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들기로 결정한 뒤 전국을 휩쓸고 있는 반전 캠페인의 물결 속에서 민주노동당(민노당)은 이 전쟁 자체와 파병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유일한 제도권 정당으로 떠올랐다. '먼 곳의 포연을 대가로 가까운 곳의 평화를 산다'고 요약할 수 있을 부시와의 거래에서 정부가 충분히 슬기로웠는지를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민노당이 한국 정치의 명예를 부분적으로나마 지켜냈다는 판단은 안전하게 내릴 수 있을 법하다. 민노당이 만약에 집권당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유혹적인 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민노당은 지난 2000년 1월에 창당한 이래 세 차례 큰 선거를 치렀다. 그리고 살아 남았다. 아직 원내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96만 표도 당사자들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을 테지만,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세 해 넘게 '살아있다'는 것만도 초유의 일이다. 그 점에서 민노당은 하루하루 한국 정당 정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민노당이 광야의 선지자로 머무르는 데 자족하지 않고 현실 정치 운동의 버젓한 주체가 되려면, 우선 원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것은 새된 목소리의 선언이 아니라 잔글씨로 쓰인 프로그램이다. 민노당 강령의 '민중을 사적 소유의 족쇄로부터 해방한다'거나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거나 하는 구절들은, 강령이 본디 지니게 마련인 추상적·선언적 성격을 감안해도, 논리적으로 조악하고 경험적으로 생경하다. 그것들은 역사적 무중력 상태에서 발설된 독백처럼 들린다. 강령의 앙상함과 편향은 살을 얻으며 수정돼야 한다.
민노당도 그것을 아는 것 같다. 제17대 총선을 한 해 남짓 남겨놓고 민노당 정책위원회가 최근에 내놓은 '민주노동당 정치개혁 기조와 방안'(기조와 방안)은 이 진보정당이 이념만이 아니라 제도와 정치적 기술에도 눈길을 주어왔음을 보여준다. '기조와 방안'은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의 비율을 1:1로 하는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의석수가 아니라 득표율과 진성 당원의 규모와 연계시키는 매칭펀드제를 채택하고, 기탁금 제도를 없애거나 크게 완화하고, 선거권 연령을 현행 20세에서 18세로 낮추고,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민노당은 자신에게 부당하다고 판단한 규칙의 변경을 기존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지난 대선 때 민노당 지지자들이 막판의 절박한 상황에서 보수적 후보의 집권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적 후보에게 전략적 투표를 했다는 판단에 따른 듯하다. 기자는 민노당 강령에는 많은 부분 동의하지 않지만, '기조와 방안'의 제안들에 대체로 공감한다. 지금의 규칙은 정치 시장의 신참자들에게 진입 장벽을 너무 높게 둘러쳐 기성 정치 세력에게 부당한 특혜를 주고 있다.
사실 '기조와 방안'의 제안들은 그것들이 현실화한 뒤에야 민노당이 현실 정치권에서 튼튼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조건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류 정당들은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민노당은 이 제안들을 쟁점으로 삼으며 내년 총선에 임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기술적 쟁점들을 앞세운 선거운동은 화려함을 잃는 대신 우아함을 얻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당의 전면적 개편을 통해서든 새 정당의 창당을 통해서든, 정권과 특정 지역 사이의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 듯하다. 이것은 민노당에도 좋은 환경이다. 집권 세력의 뜻대로 정당과 지역을 잇는 고리가 약해지면, 제도나 규칙에 대한 합리적 논쟁을 펼칠 마당이 넓어질 것이고, 우아함의 호소력도 그만큼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 종 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