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개새끼야, 니가 음악 뭐를 안다고!"1990년대 말미, 내가 관여하던 녹음 스튜디오 중 하나였다. 단지 최신 녹음 장비를 만질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뮤지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던 어떤 새파란 녹음 엔지니어를 지켜 봐 오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꾹 누르고 있던 옛 성질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너무 흥분했던지, 동년배 기사들은 옆에서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 뮤지션들이 제일 겁내는 사람들이 바로 녹음 기사다. 그들은 왕이다. 녹음 엔지니어라면 안하무인이 통하는 게 한국의 대중 음악계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델 왜 갔나 하는 후회가 들 정도다. 차라리 옛날처럼 투 트랙 모노로 했더라면 그렇게 험한 꼴을 보지 않아도 됐을 걸. 그 일로 나의 '악명'은 대중음악계에 쫙 퍼졌다. 그렇게 나는 괴퍅한 늙은이가 돼 버린 것이다. 세평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더욱 나만의 한국적 록을 파고 들었다.
이후 칩거하면서 만든 음반이 나이세스에서 1993년 나온 '무위자연'이었다. '미인', '아름다운 강산' 등 나의 대표곡과 함께 녹음했던 '전기 기타 산조'가 그 음반에서 가장 품을 들인 작품이다. 앨범 유일의 새 작품이기도 했던 그 곡은 젊은 국악학자 노재명씨로부터 신쾌동의 거문고 산조, 서공철의 가야금 산조, 지영희의 해금 산조, 한주환의 대금 산조, 강춘섭의 풀피리 산조, 전추산의 단소 산조, 박종선의 아쟁 산조 등 여러 가지 산조가 녹음된 테이프를 입수해 연구한 끝에 만든 내 방식의 산조다. 취입은 완전히 즉흥 연주로 했다.
단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그 음반을 낸 것 대해 지금은 굉장히 후회하고 있다. 원래 산조란 형식은 수백년에 걸쳐 다듬어져 온 것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덜컥 내 이름을 박아 발표하고 보니, 그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 제대로 공부했다기 보다는 그냥 좋아서 즉흥적으로 해 놓고서는 작품이랍시고 내 놓은 게, 지금 돌아다보니 솔직히 말해 창피하다. 국악의 기본 패턴은 3박자인데 나는 4박자적 감각을 그대로 갖고 산조랍시고 했던 것이다. 국악을 재료로 새 음악을 탄생시키려면 10년은 국악에 바쳐야 한다. 나는 국악을 한 게 아니라, 한국적 록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나아갔다.
1998년 발표한 앨범 '김삿갓'이 그 결과다. 이것은 나의 추구점인 한국적 록의 결정체다. 이 앨범이 발표되자 언론들은 나를 가리켜 '세계 최장수의 현역 로커'라는 별칭으로 반겨 주었다. 당시 나는 새로운 의욕에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는 매일 오전 6시 기상에 2시간 조깅으로 다져 진 근력도 한몫 했을 것이다. 더 큰 이유는 딴 데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나만의 새로운 기타 주법을 만들어 자신감으로 충만해 해 있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3·3 주법'. '김삿갓'이 발표되기 전인 1994년 발견해 그 동안 혼자서 다듬고 또 다듬은 연주 방식이었다. 기타 연주에 관한 기존 상식을 뒤집는 주법이다. 왜 3·3인가? 일반적으로 기타줄을 짚는 데 쓰는 네 손가락 중 약지를 뺀 세 손가락만을 쓴다고 해서 우선 3이다. 또 코드를 짚을 때 세 음만 쓰니 또 3이다.
주관적인 이야기가 될 지 모르겠다. 나의 오랜 기타 연주 경험상 약지의 감각은 팔꿈치까지만 뻗친다. 그러나 딴 손가락은 머리끝까지 연결된다. 그러므로 감각, 즉 명령 지령이 네 손가락보다는 세 손가락을 쓸 때가 더 빠르고 섬세하게 전달된다는 것이 나의 경험치다. 기타 연주의 통념을 뒤집는 이 같은 이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다. 세 손가락만으로의 연주는 연습만 된다면 기타의 지판을 짚을 때는 네 손가락을 다 쓰는 주법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이 뛰어나다. 나는 때가 되면 세미나를 열어서라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다. 영상 작업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이뤄진다면 내 인터넷 사이트(www.sjhmvd.com)를 통해서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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