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파바로티가 모데나에서 부인과 함께 낚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칼라 극장 오디션 통보가 왔지요. 반바지 차림으로 헐레벌떡 밀라노에 도착했더니 다른 가수는 모두 넥타이에 정장을 입고 대기중이었습니다. 스칼라 극장 수위가 파바로티의 옷차림을 보고 '폴리오네 부를 거요'라고 물었지요." 오페라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종호(44)씨의 재미있는 강의에 40여 명의 회원들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로마 공화정 말기를 배경으로 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남자 주인공으로 갈리아에 파견된 로마 총독 '폴리오네'의 옷차림을 소재로 한 농담이다.강남구 신사동 휴빌딩 5층에 자리잡은 문화공간 무지크바움의 수요일 일정은 오페라스쿨 '파미나'이다. 지난주 강의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전곡 감상. 야외에서 강한 바람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열연하는 왕년의 명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의 모습이 담긴 1974년도의 실황 공연 DVD가 교재였다.
무지크바움에서 고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6개 동호회 가운데 '파미나'는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오페라 입문자를 위해 박씨가 강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음악나무'라는 뜻의 무지크바움은 2001년 5월에 문을 열었다. 42평의 공간에 40여 개의 좌석, DVD를 감상하기에 좋은 대형 TV와 진공관 앰프, 고성능 스피커 등을 갖췄다.
무지크바움의 전신은 교대역 근처에 있던 클래식 음악카페 '바흐하우스'. 2000년 4월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바흐하우스에 모이던 동호인들이 뜻을 모아 무지크바움을 꾸렸다.
오페라 동호회 광장클럽의 9명,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의 1명이 공동으로 출자했고 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바흐하우스를 운영하던 최예린씨가 대표를, 박씨는 고문을 맡았다.
박씨는 "카페 스타일인 바흐하우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무지크바움의 각 동호회 회원은 월 8만씩 운영비를 분담하고 있다. 한 동호회에 소속된 사람이 다른 동호회 모임에 참석할 경우 회당 1만원을 따로 낸다. 모임 중간에 간단한 다과가 제공되고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동호회가 모이는 시간 이외에는 문을 닫는다. 주로 오프라인을 통해 활동하기 때문에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입 소문을 타고 애호가들이 모여들었다.
저렴한 대관료로 좋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하이텔, 프리챌, 유니텔 등의 온라인 클래식 동호회와 국립발레단 동호회, 피아노 포르테, 청년 바그네리안 등 10여 팀이 자주 이곳을 이용한다. 박씨는 "무지크바움이 하드웨어라면 참여 동호회와 사람들은 소프트웨어"라고 설명했다.
클래식음악을 감상하는 클래식바움과 음악기행, 오페라를 감상하는 광장클럽과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 오페라 스쿨 파미나, 발레를 중심으로 무용을 다루는 발레바움 등 무지크바움의 '소프트웨어'는 각 분야의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로 이뤄져 있다.
오후에 모이는 클래식바움과 광장클럽, 발레바움은 직장인들의 참여가 많고 오전에 모이는 동호회는 주부들이 주축이다. 가장 오래된 동호회는 광장클럽과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이다.
발족 5년이 넘은 광장클럽은 모임에서 오페라 해설자로 데뷔해야만 정회원 자격을 준다. 금요일 저녁 8시부터 11시30분까지 진행되는 모임에서 지금까지 해설자로 나선 사람은 박종호씨와 윤홍근 사법연수원 교수, 이비인후과 전문의 장근호씨, 한국신용평가정보부장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유형종씨, 서울대 미학과 강사인 이수완씨, 한진중공업에 근무 중인 김경호씨 등이다. 감상자는 언제나 환영한다.
4년 전 서초동의 한 갤러리에서 시작한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는 주부와 약사, 의사, 화가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준 전문가 집단이다. 베르디 서거 100주년 때는 밀라노에 직접 가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등 공연 관람도 활발하다. 40여 명의 회원 중 창립 멤버가 10여 명에 이르는 등 참여가 꾸준해 10여 명의 대기자는 결원이 생길 때만 기다리고 있다. 6월에는 성악가를 초빙해 5주년 기념 음악회도 열 예정이다.
국내 오페라단도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의 움직임에 은근히 신경을 쓴다. 한국오페라단은 28∼30일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리는 오페라 '춘희'의 주연들이 출연하는 DVD 상영회를 무지크바움에서 가졌다.
이들은 좋은 공연으로 인정하면 티켓을 다량 구매하는 열의를 보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전파력을 발휘, 흥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호회들이 모여서 단체관람을 하는 경우도 있다. 25일부터 열린 통영국제음악제에는 무지크바움 동호회가 버스를 대절해 직접 내려갔다.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의 회장 김순자(47)씨는 "앙드레 말로가 애호가는 창조자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듯 애호가는 또 다른 생산자"라고 강조했다. 무지크바움의 동호회가 문화발전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평가도 그래서이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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