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학을 하는가. 어떤 작가는 단도직입적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문학을 한다고 하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작가의 대범한 솔직성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럼 먹고 살기 위해 하필이면 문학이라는 것을 택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학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문학이 나를 택하였다고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의 결과는 피선택자의 수용 여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이쯤 되면 '왜 문학을 하는가'하는 질문은 '왜 문학의 선택을 받아들였는가'로 바뀌게 된다.나는 문학이 나를 선택하려고 한다는 예감을 아주 어릴 적부터 느끼고 있었다. 좀체 눈 구경을 하기 힘든 부산에서 어느 새벽에 뒷마당 장독대에 쌓여 있는 하얀 눈더미를 보았을 때, 따스한 봄날 딱딱한 학교 운동장을 비집고 올라오는 연둣빛 새싹을 내려다보았을 때, 오륙도를 지나 멀리 수평선을 벗어나고 있는 기선들을 바라보았을 때 등등, 내 두 눈에 들어온 풍경을 어떡해서든 말과 글로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그러한 선택을 예감하였다.
그러다가 바깥 풍경보다는 내면의 풍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원노조위원장으로 투쟁을 하다가 5·16 쿠데타가 일어나 감옥으로 가게 된 사건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진 가정은 초등학교 6학년인 나의 마음에 음울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한 내면의 풍경도 나에게 강렬한 표현 욕구를 일으켜 매일 제법 긴 일기를 쓰게 하였다.
반 아이들 앞에서 내 일기 공책을 읽으시던 담임 선생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을 목메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도 다 큰 어른을 말이다.
이런 표현 욕구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인간 실존에 관한 끊임없는 의문들이 뒤따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나는 꿈속에서 내가 죽어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나의 시체를 내가 천장쯤 되는 높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때만큼 강렬하게 나의 의식을 파고든 적도 없었다.
그럼 지금 존재하는 나는 무엇이며, 이 땅에서 사라진 후의 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평소에는 일상의 소음에 묻혀 있다가 방학이 되어 고향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놀러 가게 되면 저 밑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곤 하였다. 외할머니 댁 안방 황토벽에 붙어 있는 창호지 문을 열면 바로 몇m앞에 전신주가 서 있었는데, 그 전신주가 밤마다 곡하는 소리 비슷한 울음을 울었다.
밤중에 문득 깨어나 그 전신주의 울음을 듣고 있노라면, 온 세상이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이 여겨지면서, '그럼 지금 존재하는 나는 무엇이며 이 땅에서 사라진 후의 나는 무엇인가' 하는 그 질문이 명치를 지그시 누르는 것이었다.
나는 훗날에 그 질문이 신이 인간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어린아이들이 실존적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만화경'이라는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신춘문예 관문을 통과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강렬한 표현 욕구와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들이 내가 문학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와 의문들이 있다고 하여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을 또한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 능력을 본격적으로 계발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현대문학' 잡지를 100여 권 통독하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산에서 혼자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였는데, 그 집 다락에 '현대문학'이 창간호부터 모아져 있었다. 고독한 사춘기 시절에 나는 1년 동안 그 '현대문학'을 통하여 천 편에 가까운 단편들을 읽어 젖힌 셈이다. 물론 시와 평론도 함께 읽게 되었다.
김동리 황순원 김정한 손창섭 이범선 박영준 안수길 강신재 이호철 최인훈 이봉구 이문희 이주홍 손소희 장용학 강용준 최상규 등등 이루 다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섭렵하고 나자 어느새 나는 펜을 들고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좀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 위해 국어 문법책 한 권을 공책에 필사하여 또 한 권의 두툼한 문법책을 장만하였다.
문법책 필사 공책을 보고 깜짝 놀란 국어 선생은 그 공책을 각 반으로 들고 다니며 국어 공부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훈계하기도 했다(어쩌면 각 반으로 들고 다닌 것이 아니라 우리 반에서만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가 되려면 글만 잘 써서는 안 되고 하나의 세계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김동리에 관한 평론을 쓰면서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 평론을 쓰기 위하여 나는 김동리의 모든 단편들을 독파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거쳤다. 김동리의 단편들은 이상하게도 사춘기에 해당하는 주인공들이 많았다. '무녀도'의 낭이와 욱이, '역마'의 성기와 계연, '달'의 달이와 정국, '정원'의 철이와 정아, '천사'의 병수, '까치소리'의 영숙 등등이 그러하였다. 나는 그 사춘기 주인공들의 심리를 분석하여 '고독과 육정과 사춘기'라는 제목의 평론을 써서 교지에 발표하고 마치 평론가라도 된 것처럼 으스댔다.
그런데 그 평론의 제목대로 '고독과 육정'이 나의 사춘기를 강타하였다. 육정은 곧 성(性)의 문제였다. 성은 늪이었고 나는 그 늪에서 빠져 나올 길을 찾지 못하였다. 성의 늪에서 겨우 빠져 나오게 해 준 것은, 갖가지 질병들로 이어진 사다리였다. 그 사다리 끝에는 흔히 형이상학적 질병이라 일컬어지는 종교가 놓여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사다리 끝에 이르렀다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였다. 하지만 늪 속으로 곤두박질치면 거기에는 항상 그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사다리는 온통 질병의 사다리이면서 구원의 사다리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종교의 문제는 곧 성의 문제이다. 종교의 암반을 천착해 들어가면 성이라는 거대한 광맥을 만나게 된다. 반대로 이야기해도 진실이다. 성의 암반을 파고들어가면 종교라는 거대한 광맥을 만나게 된다. 종교는 성을 질책하지만 사실은 성을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의 늪에 빠진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종교는 부흥한다. 요즈음 교회 바로 옆에 모텔이 들어서고 교회와 모텔 수가 어슷비슷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종교와 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내 문학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종교와 성의 정체,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 등을 밝혀나가는 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 2월18일 한 일간지에 재미있는 전면 기사가 실렸다. 세계적인 한국어학 교수인 로스 킹과의 인터뷰였다. 그 교수가 22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나니 이제는 번역을 할 만큼 실력이 길러진 것 같다면서 내 소설과 고전문학인 '변강쇠전'을 번역하기로 '찜'해 두고 있다고 하였다. 내 소설을 평하면서 '내용이 굉장히 재미있는 데다 1970·80년대 한국 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작품들이다. 미국 작가들에게 잘 읽힐 것이다'고 하였다. 내 작품을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있다는 외국인을 거의 만나본 일이 없어 반가운 마음에 자기 자랑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엇보다 '미국 작가들에게 잘 읽힐 것이다'는 말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세계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성의 문제는 그야말로 세계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종교와 성의 코드로 '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작품'을 쓸 수도 있는 법이다.
세계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내가 문학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논필개세(論必蓋世)의 야망이 그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문학에 눈뜨게 해준 '현대문학'에 20년을 내다보고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 연작소설을 지난 1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들이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 연보
1951년 경남 고성 출생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만화경' 당선 등단 1972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2000년∼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집 '왕과 개' '굴원의 노래''라하트하헤렙' '통도사 가는 길' '안티고네의 밤'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장편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 '천년 동안의 고독' '아니마, 혹은 여자에 관한 기이한 고백들' '우리 시대의 사랑' '에덴의 불칼' '야훼의 밤' '욕망의 오감도' '홍루몽' '난세지략'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맹자와의 대화' '전국시대' '일연의 꿈, 삼국유사' '삼국지' 등 오늘의작가상(1985) 기독교문화상(1986) 이상문학상(199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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