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3월25일 아침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를 타고 출근하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강원상(康元相)·이홍래(李鴻來) 두 젊은이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테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이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동시 테러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친일파 관료들은 얼마간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을사오적이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준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에 찬성했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이 날의 동시 테러를 기획한 것은 나철(羅喆)이 이끄는 오적암살단이었다. 뒷날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의 교조가 될 나철은 그 해 2월28일 폭탄을 넣은 상자를 선물로 위장해 박제순과 이지용의 집에 보냈다가 폭탄이 터지지 않아 이들의 처단에 실패한 뒤, 매국 대신 다섯을 일시에 죽이기로 작정하고 동지들을 모은 뒤 이 날 거사를 벌였다.
그러나 오적암살단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광화문 해태상 근처에서 박제순을 기다리던 나철과 오기호(吳基鎬)는 일본군의 호위가 너무 삼엄해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놓쳤고, 돈의문 근처에서 이완용을 기다리던 단원들도 시장기를 면하고자 잠시 주막에 들른 사이에 이완용이 지나가 버려 허탕을 쳤다. 한편 조금 늦게 집을 나오려던 이근택은 권중현이 저격당했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아, 그를 기다리던 단원들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철은 다시 거사를 꾀하다 체포돼 전남 신안으로 유배되었고, 풀려난 뒤 대종교를 창시해 포교하다가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詞)에서 일제의 학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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