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한달을 맞았다. 문희상 비서실장은 24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지나온 한달이 300일, 아니 3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노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할 굵직굵직한 현안이 꼬리를 물었다는 뜻이고 결단에 따른 고민도 컸다는 얘기다. 문 실장은 한달간 이루어진 노 대통령의 '청와대 실험'에 대해 "소프트랜딩(연착륙)했다"며 "청와대에 토론 문화가 시작됐음을 실감한다"고 자평했다. 대북 송금사건 관련 특검법 처리, 검찰 개혁, 이라크전에 대한 입장 정리, SK 수사관련 대응 등 지난 한달 동안 있었던 대표적인 현안의 사례분석을 통해 의사결정이 실제 어떤 과정에 의해 이뤄졌는지 되짚어보았다.특검법 처리 노 대통령은 14일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국무회의에 입장하기 직전, 참모들에게 "받아야 되겠죠"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검법을 수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이는 국무회의에서의 토론 이전에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얘기다. 또 국무회의 직전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 조건부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던 민주당 지도부의 건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한나라당과의 물밑 협상에서 진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국무회의에서도 다수 의견은 거부권 행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특검법 처리에 관한 한 노 대통령은 당의 의견이나 국무회의 토론 결과 보다는 자신의 결단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무수석실에서 국무회의에 앞서 거부권 행사 불가를 내용으로 하는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에 이것이 결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검찰개혁 인사태풍으로 시작된 검찰개혁의 드라이브는 강금실 법무장관을 발탁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때문에 오히려 강 장관이 기수파괴의 인사를 단행하려 할 때 청와대의 분위기는, 노 대통령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참모들이 강 장관을 적극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평검사들과의 토론회'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다소 일방적인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청와대 참모 사이에서 격론이 붙었던 것은 그 이전의 조각단계에서 강 장관의 발탁을 강행할 것이냐 여부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 "많은 반대 의견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강 장관의 임명은 토론이 영향을 미칠 사안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라크전 파병 노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지원 필요성과 반전 여론 사이에서의 고민을 "주춤주춤"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지원은 하되 국민정서를 최대한 반영해나가면서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에 대한 '당당한 외교'를 강조해온 노 대통령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NSC, 임시 국무회의,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를 잇따라 거치면서 미국에 대한 입장은 적극 지원, 이라크전에 대한 조기파병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와 관련해선 이라크전 이후 북핵 문제가 다시 최대의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됐을 경우에 대비해 미국에 대해서도 명분보다는 실리 위주의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통일·외교·안보 라인의 상황인식과 건의가 주효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노 대통령이 발탁한 개혁 성향의 윤영관 외교부 장관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감안,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실리 외교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SK수사 SK 수사에 대한 새 정부의 개입 여부와 관련, 정권 내부에서 어느 정도까지 토론이 이뤄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부분의 정권 참여자들이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수사속도의 조절 필요성을 언급한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새 정부 출범 초 경제위축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안에 대한 토론 결과는 처음부터 한쪽 방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김진표 재경부총리 등이 검찰총장을 비공개에 만난 사실이 알려진 후 사후수습을 놓고 토론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당초 청와대는 각료가 검찰총장을 만나 국정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적절했다고 강변했으나 나중에 검찰총장을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고 법무장관을 경유토록 수정했다. 토론 없이 먼저 옳다고 해놓고 토론을 거쳐 신중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더라는 얘기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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