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첸의 역사평론집 '피안에서'를 발견한 것은 미국에서 대학 3학년 때 수강한 러시아 사상사 필독서 목록에서였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책은 역사학도로서 단순히 러시아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교재 이상의 것이 됐다.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태두라고 볼 수 있는 게르첸은 명문 부호의 늙은 아버지와 17세의 독일 출신 가정교사 사이에서 적자 없는 서자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1840년대 지식인 논쟁에서 서구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혁명의 성공이 결국 러시아에도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그 자유의 귀결점은 사회주의라고 믿었다. 아버지의 엄청난 유산은 상속했지만 끝내 야코블례프라는 이름은 포기해야 했던 그는 일생을 러시아 반체제 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847년 말 전 재산을 정리해 망명길에 올랐다.
'피안에서'는 큰 기대감 속에서 폭풍 전야 유럽에 도착한 그가 1848년 혁명의 전개과정을 목도하며 체험했던 엄청난 고뇌의 기록이다. 그 스스로 자기가 쓴 다른 어느 책보다 소중하게 생각했고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과 '독일 이데올로기',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함께 유럽역사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는 평가를 받는 책이다.
내용은 역사를 상징하는 배 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저자 자신의 이상주의와 회의주의를 각각 대변하는 이 둘의 화두는 역사에 진보 혹은 발전법칙이란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게르첸은 19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을 선포하고 권력을 잡았던 부르주아지가 이제 자기들의 몫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한 '6월의 날들'의 유혈극을 목도하고는 깊은 회의와 고뇌에 빠진다. 대안도 없으면서 노동자들을 선동, 부르주아지의 도구가 되게 해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 지식인들은 도덕적으로 무책임하고 지적으로 오류에 빠지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자유란 배부른 자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사치가 아닌가 하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결론이 있을 수 없는 대화이다. 그러나 분명히 부각되는 것은 역사에서 가장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는 존재는 피와 살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지 자유, 평등, 인류애 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며 어린이의 목적은 뛰노는 데 있지 어른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의 절규이다. '피안에서'는 내게 역사를 보는 눈을 뜨게 해 준 책이다.
이 인 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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