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슬픈 戰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슬픈 戰場

입력
2003.03.22 00:00
0 0

햇볕이 따스해졌습니다. 아직 봄은 아니어도 봄볕이 완연합니다. '만물이 되살아나는 계절'이 바야흐로 열리고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그런데 우울하고 답답합니다. 전쟁이 일고 있습니다. 예견했던 일이고, 예정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기를 구체적인 몸짓들로 염원했던 일이기도 한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세상이 커다란 하나가 되었다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지구 위 어디 있든지 누구나 서로 끊어진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지만 그런 말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수사(修辭)들인가 하는 것을 이렇게 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소식만 들으며 살아가지만 포탄 아래에서 죽어가는 삶이 지평선 너머에 엄연하게 있다는 사실, 이것은 아무래도 '희극'이라고 해야 겨우 묘사할 수 있는 '비극'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겪은 '전장(戰場)'의 상흔이 아물어질 무렵,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갑자기 그 '전쟁'을 그 때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졌습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신문철을 뒤져 '한국전쟁의 발발'을 보도한 기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도 묘사할 수 없는 내 절박한 비극이 '흥미로운 사건'으로 다루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허옇게 아팠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전쟁을 스포츠 중계하듯 하고 있습니다.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괴롭습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전쟁'을 말합니다. 전쟁을 설명하는 현란한 서술을 접합니다. 전쟁은 한번도 설명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인류사에 담겼던 어떤 전쟁도 그 까닭이나 불가피성을 갖추지 못했던 전쟁은 한 번도 없었을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전쟁은 아예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전쟁은 이러합니다. 모든 전쟁은 옳은 전쟁입니다.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승패로 갈라져 귀결이 됩니다. 그리고 승리는 정의나 진리가 가져다 준 선물이 됩니다. 승리는 전쟁을 설명하는 마지막 실증입니다. 패배는 아예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합니다. 전쟁은 이처럼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는데 승리는 모든 것의 얻음이고 패배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무수한 영웅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의 격을 넘어서는 자리에 올라가고, 그를 본받는 일이 삶의 규범으로 기능하기조차 합니다. 이러한 정당화, 승리, 영웅들을 통하여 전쟁은 마침내 '기려야 할 것'으로 역사 속에,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전장'은 다릅니다. 전장은 설명이 기능할 수 없는, 그 이전의, 살육의 장입니다. 까닭을 설명하고 현실을 정당화하기에는 너무 절박한, 아니 그런 것이 차마 들어설 수도 없는, 공포와 증오와 살의가 살아 날뛰는 현장입니다.

전장은 승리도 패배도 배태하지 않습니다. 비록 전쟁이 끝난다 할지라도 남는 것은 처절한 파멸뿐입니다. 그것이 전장의 실상입니다. 영웅을 운위하는 것은 사치입니다. 그것은 전장이 낳은 것이 아니라 전쟁이 만들어낸 '설명'에 포함된 삽화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장의 경험, 전장의 현실은 전쟁을 기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장은 전쟁을 기억하기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또 전쟁입니다. 그리고 어느 틈에 우리는 '전쟁'을 설명하는 일에 바쁩니다. 그리고 그 바쁨 속에서 '전장'의 소식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어차피 막지 못한 전쟁이라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장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 처절한 현실을 정서적으로라도 함께 하는 일입니다.

봄인데, 참으로 나약하고 슬픈 일이지만,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정 진 홍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