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동맹군은 21일 저녁 8시5분(한국시간 22일 새벽 2시5분)께부터 수도 바그다드와 북부도시 모술을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는 그 동안의 제한적인 폭격에서 벗어나 전면 공습을 뜻하는 '충격과 공포'작전에 돌입했음을 의미한다.미·영 동맹군은 이날 해상의 순양함에서 크루즈 미사일 8기를 발사하는 동시에 영국 본토에서 발진한 B―52폭격기 편대를 동원, 바그다드 남서쪽 대통령궁 일대에 융단 폭격을 감행했다.
TV화면으로 보여진 바그다드상공은 검은 연기로 뒤덥혔고, 폭격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듯했다. 미·영 동맹군은 또 바그다드에서 150㎞떨어진 북부의 유전도시 모술와 그 인근 지역을 집중 겨냥했다.
이라크 영내로 진격을 개시한 미·영 동맹군은 이날 파죽지세의 진군을 계속해 이라크 남부 바스라 시내에 들어섰다. 이라크군의 저항이 거세지 않아 M―1A2 에이브럼스 탱크와 AH―64D 아파치 롱보 헬기 등을 앞세운 미·영군은 사막을 거침 없이 질주했다. 외신들은 "미영군이 큰 저항 없이 바스라 입구 도로까지 진입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쿠웨이트에 주둔했던 미 해병 제1 원정대와 육군 제3 보병사단, 영국의 해병 특공대 등은 20일 오후 8시(이하 현지시간) 이라크 국경을 넘었다. 미영군은 이라크 남부 사막에 수 천 발의 포격을 가한 뒤 오후 10시부터 본격적으로 진격했다. 미영군의 지상군 진입이 예상보다 하루 정도 앞당겨진 것은 이라크군의 지뢰 매설을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미군이 국경에 있는 4개의 이라크군 관측초소에 포격한 뒤 전기철조망 등을 제거하고 이라크 영토로 들어 갔다"고 전했다. 이라크 초소에 있던 일부 군인이 저항하다 사살됐으나 그 뒤로는 거의 이라크군의 저항이 없었다.
미군의 중대장인 로빈 존슨 대위는 "우리는 바스라 입구까지 진입하는 과정에서 이라크군을 거의 만나지 못했으며 100여 마리의 낙타 무리만을 만났다"고 전했다.
미영군은 21일 오전 4시5분께 전폭기 등을 동원, 바스라 지역에 대한 공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미영군은 또 쿠웨이트 접경 움카스르 마을을 장악하고 알 포 반도에 있는 산유 시설을 점령했다.
미영군은 이와 함께 20일 오후 9시께 이라크 바그다드를 집중 폭격해 대통령궁 인근 건물 3곳을 파괴했으며, 21일 새벽 4시30분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도 공습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바스라 북부의 안 나시리아 지역을 1차 저지선으로 정했기 때문인지 미영군이 바스라 입구에 진입할 때까지 결사항전을 하지 않았다. 이라크군은 이날도 쿠웨이트에 3발 가량의 미사일을 발사했으나 모두 미군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의해 요격됐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외신 종합
■바스라는
바스라는 이라크 제2의 도시이자 최대 무역항으로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88년) 당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이란군의 포격으로 정유소와 도심이 크게 파괴됐으나 점령 당하지는 않았다. 1991년 걸프 전 당시에는 다국적군 제 7군단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대파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7세기 중반 군가기지로 건설된 바스라는 8,9세기 걸프해 최대 무역항으로 번영한 뒤 쇠락했으나 1948년에 유전이 발견되면서공업도시, 항구도시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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