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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만화] 신동헌 만화영화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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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만화] 신동헌 만화영화 "홍길동"

입력
2003.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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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7일. 그 날은 우리 만화 역사에서 기념비를 세울 만한 날이었다. 서울의 대한, 세기극장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 7개 개봉관에서 총천연색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이 개봉됐기 때문이다. 개봉 나흘 만에 10만 명의 관객이 몰리는 대박을 터뜨렸다.'만화왕국'으로 불리는 이웃나라 일본은 그 날 "드디어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고야 말았다"며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만화의 신(神)'이라고 추앙했던 데즈카 오사무(手塚治, 1928∼1989)가 최초의 TV용 만화영화 '철완 아톰'(아톰)을 만든 게 불과 4년 전인 1963년이었고, 컬러 애니메이션 '정글 대제'(밀림의 왕자 레오)도 TV용으로 1965년에야 겨우 선을 보였다.

60년대의 애니메이션 제작은 배경 원화(原畵)를 밑그림 삼아 그 위에 셀룰로이드 필름에 인물의 구분 동작을 일일이 '셀(cell)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이었다. '홍길동'에는 12만5,000여장의 셀 그림이 소요됐고 이를 이으면 3,700여㎞에 달했다. 제작비는 당시 실사영화의 10배에 가까운 거금 5,400만원.

이 만화영화를 감독한 사람이 바로 신동헌(申東憲·76)이었다. 친동생인 신동우(申東雨)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신동헌 선생은 그때를 회상하며 "줄잡아 하루 평균 400명의 애니메이터가 1년을 꼬박 그림작업에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국산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순전히 국내 애니메이터의 손으로 제작 전 과정이 이루어졌다. 거기에다 작품 내용도 '한국산 오리지널리티'를 만방에 과시한 수작(秀作)이었다. 특히 아름드리 나무가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그 밑에 수 없이 많은 병졸이 깔리는 장면의 묘사는 압권이었다. 열정과 투지 하나로 뭉친 1세대 애니메이터들이 이룬 쾌거였다. 신 선생은 이를 진두 지휘한 '아시아의 월트디즈니'였다.

서울대 공대 건축과 교양학부 시절 명동에서 초상화를 그려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우연히 '코주부'의 김용환을 만나면서 만화공부를 시작했다. 스물 한 살 때인 1947년 '스티브의 모험'으로 작가데뷔를 한 뒤 어린이만화, 신문 시사만화, 대중만화 등 출판 만화의 전 영역을 섭렵하는 인기만화작가로 활동했다.

만화영화 '홍길동'은 1995년 12월, '돌아온 영웅 홍길동'으로 리메이크, 개봉되기도 했으나 이 작품은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터의 손을 거쳐 완성되는 등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홍길동전'의 만화영화 필름은 현재는 한 벌도 남아있지 않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60·70년대 농가부업으로 장려된 밀짚모자를 만들면서 그 필름들은 가로로 길게 쪼개져, 모자 테두리 끈으로 장식되는 '웃지 못할' 쓰임새에 몽땅 거덜나고 말았던 것이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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