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출판계는 IMF 위기 때 못지 않은 불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출판인들은 경기 호조와 캠페인 하듯 펼쳐진 신문·방송의 책 소개 덕에 모처럼 주름살을 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사이 분위기는 반전됐다. 많은 출판인들이 몇 년 전의 줄 도산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결성 10년째를 맞은 젊은 출판인 모임 '책을 만드는 사람들' 창립 회원인 40대 중반의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인 4명이 최근 한 자리에 모여 이런 출판계의 흐름을 속시원히 이야기했다. 서울 인사동에서 점심을 겸해 이뤄진 좌담은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3시간 넘게 이어졌다.부실한 번역
이야기는 한국일보를 비롯한 몇몇 일간 신문이 최근 잇따라 부실 번역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데 대해 속내를 털어놓는 데서 시작됐다. "잘못된 번역 지적하는 건 옳지만 잘한 번역 꼽아 주는 것도 필요하다."
국내 필자들이 직접 쓴 책보다 번역서 한 권 내기가 훨씬 어렵다는 건 지금 국내 출판계가 안고 있는 냉정한 현실이다. "좋은 번역자 구하기가 힘들다. 수완 있게 번역서를 다듬어 낼 편집자도 태부족이다." 좋은 번역서 내기로 국내 출판계에 정평이 나 있는 한 출판사 사장이 편집자 구하기가 힘들어 발행 종수를 확 줄이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놀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결국 번역서 홀대하는 풍토가 '주범'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대학에서는 여전히 1년 넘게 걸리는 400쪽짜리 책 번역을 30쪽 소논문 한 편보다 업적 평가를 안 해 준다." 번역물이 대접 받으면 자연히 번역에 관심을 갖는 실력 있는 연구자들이 많아지고, 또 편집자도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오르는 책 값
"경제·경영서나 대중문학책, 얄팍한 에세이가 외형을 화려하게 꾸미고 유행처럼 양장본으로 만들어져 책값이 올랐다. 출판계 일각에서는 책값 많이 받아도 된다는 생각이 있다." 만원 짜리 한 장 들고 웬만한 책 한 권 사려다가 큰 코 다치는 세상이 된 건 분명한 문제다.
책값에 거품이 있다는 점을 출판인들도 인정했다.
견해가 엇갈렸지만 도서 정가제를 출판사가 목숨 걸고 사수할 제도라는 주장에 선뜻 수긍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 동안 대형서점에 책을 위탁 판매할 때 출판사 할인율은 30∼40% 정도. 인터넷 서점 공급가도 비슷했다. 정가제 이전 정가 파괴로 나타난 대단한 혼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정가제 시행 이후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다는 지적이다.
결국 인터넷 구매 할인율만 낮아지고 독자가 적은 부담으로 책 살 기회만 줄어든 셈이다.
20대 독자성향
"지금 20대는 독서 시장에서 버려야 한다. 박정희 개발 독재 시절 교육 받은 부모 아래서 1970·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창 시절 가장 혹독한 입시 위주 교육을 받고 컸다. 그들은 제대로 된 독서 훈련이 부족하다. 문학시장의 위축이 그 방증이다."
문화가 책에서 영화로, 텍스트에서 영상물로 옮겨 가는 탓도 있지만, 그 이면에 '책 읽지 않는 20대'라는 세대 특성이 뚜렷이 자리잡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나마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격동기에 대학에서 책을 탐독한 젊은이들이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타격이 덜하다. 하지만 감수성 예민한 세대가 최대 소비층인 문학시장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는 5, 6년 후의 구조적 불황을 걱정한다. 대신 지금 유치원생에 기대를 건다. 독서에 애착을 가진 386세대 부모에게 책 읽는 문화를 배우며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어린이 책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는 분석이다.
올 출판시장
"3월 들어 책이 안 나간다.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 국내 출판 전체 매출이 전달에 비해 25% 떨어졌다. 1월 출판 시장이 전달에 비해 20% 늘어나는 예년의 상황을 감안하면 결국 40% 넘게 출판 매출이 떨어진 셈이다."
6, 7개월 뒤 출판 시장 상황을 보여줄 저작권 대행사(에이전시)의 계약률도 급감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는 수요는 말할 것도 없고 책 공급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줄 것이란 얘기다.
"지난해는 방송의 책 프로그램이나 7차 교육과정 개편 덕분에 국내 출판시장이 외환위기 이후 최대 호황을 누렸지만 상황이 곧바로 역전됐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그 후 북핵 위기까지 닥치면 출판시장은 된서리를 맞을 게 더욱 분명하다. 독자의 책에 대한 관심이 줄 것이고, 신간을 알릴 미디어 홍보 기회를 다른 뉴스에 뺏길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글·사진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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