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엔 봄이 와도 그곳은 봄이 아니었다. 참사 한달 째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지하역사. 한 달을 울어 눈물이 바닥난 가족들은 가슴으로 울고 있었고, '혹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도'란 희망을 담아 내걸린 실종자의 사진은 어느덧 영정이 돼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호명되는 사라진 혈육의 이름에 대신 답하고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의 브리핑을 듣는 것으로 가족들은 또 하루를 시작했다. 백열등이 햇볕을 대신하는 지하 역사안 거친 스티로폼 위를 떠나지 못하는 가족들은 "혈육의 사망 소식을 손꼽아 기다려야 한다니 어이가 없다"고 했다. 벌써 한 달이 흘렀고, 봄이 왔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역사 한 켠에 내걸린 부모 사진 위 시커먼 먼지를 닦아내던 박미정(33)씨를 만났다. 박씨는 이번 참사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박씨의 농사꾼 아버지(67)는 매일 일기를 써왔고 그 일기는 2월17일자 "내일은 병원 가는 날이다"로 끝났다. 박씨의 부모는 다음날 경북 예천 집을 나와 대구 영남대병원을 가기 위해 그 시각, 그 지하철을 탔다.
박씨는 이후 아버지의 일기장 여백을 대신 메웠다. 막내딸인 박씨는 부모의 반대로 결혼식도 못 올리고 두 아들을 낳아 살아왔고, 올해 초 승낙을 받아 결혼식을 올릴 참이었다고 했다.
2월18일. 오전 뉴스속보가 나왔다. 중앙로역에 불이 났다고. 그 속에 부모님이 계시는 것도 모른 채. 밤에 언니의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엄마가 지하철에 타신 것 같다"고. 예천집에 전화를 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안돼 전화받아. 안돼."
2월19일. 다른 가족들과 함께 차량이 옮겨진 월배기지창에 갔다. 아버지 엄마가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는 전동차 안에 계시다니.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설움이 복받쳐 미쳐 버릴 것 같다. 난 아직 효도 한번 못했는데.
2월22일. 비가 내렸다. 중앙로역에서 집회가 있어 사고현장에 처음 가봤다. 저 속에 내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다니. 서둘러 복구 공사를 한답시고 조립식 판넬을 가져다 놓았다. 화가 치밀었다. 또 불이 나면 어쩌려고 유독가스 심한 그것을. 내 손으로 뽑은 사람이 내 부모님을 죽였다는 생각에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비는 왜 이렇게 오는 건가.
2월25일. 안심기지창에서 손과 발, 유류품이 나왔단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시신을 어떻게 그렇게….
참사후 대구시민회관 대기실에 머물던 실종자 가족들은 22일 처음으로 사고현장인 중앙로역을 찾았다가 복구를 서두르는 대구시에 격분했고, 이후 중앙로역 지하1층에 스티로폼을 깔고 기약 없는 농성에 들어갔다. 대구시측의 성급한 현장 물청소, 유류품 훼손 등이 밝혀지면서 유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3월2일. 추모식날. 하얀 풍선에 '사랑합니다. 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라고 써서 멀리 날렸다. 아직 시신도 못찾았는데 이별을 고한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3월3일. 집 근처 절에 부모님을 모셨다. 국화꽃속 두분 사진…. 하루빨리 두분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드려야 하는데. 죄지은 게 많아서 울고, 밥 한끼 따뜻하게 못해드려 또 울었다.
3월6일. 예천집에 가봤다. 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의 작은 등, 임신하고 엄마가 해주던 닭개장. 이제 누가 있어 해줄까. 살아계실 때 조금만이라도 잘해 드렸으면 이렇게 후회되진 않을텐데….
3월10일. 대구역에서 홍보전단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태반, 가슴위'피해자 가족' 리본을 보고서야 전단지를 받아든다.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간다는 게 왠지 모르게 섭섭하고 화가 났다. 확인된 것, 밝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 잊혀지다니….
유족들은 사고원인에 대한 명쾌한 해명, 탈출구를 가로막은 역사 내 방화벽, 현장보존 실패 경위 등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해왔지만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당국의 답변은 헐거워져 가고 있다. 경찰은 방화범 김대한씨와 1080호 기관사 최상열씨, 운전사령실 직원 등 모두 8명을 구속한 뒤 중앙로역사 현장보존 실패 책임자와 진상은폐조작 관련자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마땅한 처벌 법규조차 못 찾고 있다.
경찰은 지하철 운영 전반에 대해서도 수사를 한다고는 했지만,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가족들의 감정을 만족시킬 처벌은 불가능"함을 가족들도 안다. 10일 인정사망심사위원회도 꾸려져 신원확인이 안될 경우에 대비,정황 증거 등을 근거로 인정사망 심사에 들어갔다. 세상의 관심이 멀어지는 가운데 가족들 앞엔 혈육의 사망을 입증해야 하는 고통이 기다린다.
3월11일. 실종자 가족 대책위에 시신을 일괄 인수키로 위임장을 냈다. 지하에서 새우잠을 함께 자면서 다른 가족들과 친 동기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허위 신고자들로 불신이 싹트고, 시신 인계를 두고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비극의 열차 1080호에서 발견된 시신은 모두 149구. 한 달이 됐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이중 20구뿐이다. 국과수는 확인된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할 예정이었으나 가족대책위원회가 일괄인도를 요구하며 명단을 넘겨 받는 것도 거부했다.
"시신을 놓고 흥정하느냐"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있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남겨지는 슬픔이 두렵고, 남겨질 가족의 슬픔도 안다. 그래서 157명의 가족들은 대책위에 위임장을 내고 일괄인계 받기로 했다. 탁한 공기 속 거친 잠자리를 감수하는 이들은 죽은 이의 흔적이 눈에 밟히는 집보다는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먼저 떠나지 않겠노라고 서로서로 약속했다.
3월13일. 날씨가 포근하다. 봄 날씨다. 비가 와도 슬프고 날이 좋아도 슬프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이, 벌써 한 달이 가까워오는데. 아직 두 분 시신을 찾지 못했다.
3월14일. 시의회에 시위 갔다가 몸싸움 하느라 온몸이 쑤신다. 전경 한명이 'XX년'이라고 대놓고 욕을 했다. TV 뉴스가 나오면 혹시 새소식이 없나 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지만 잠깐씩만 나오는 참사소식. 슬프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 마세요. 두분 시신 꼭 찾아 저희가 모실게요.꼭.
그렇게 200여명 실종자 가족들의 한달은 지나갔다.
중앙로역엔 시민들의 발길이 아직은 이어진다. 학교를 파한 여중생들은 호기심에 겨워 재잘대며 향내 자욱한 지하역사로 들어서지만 나갈 때는 말이 없다. "이곳에 오면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일부러 몇 번씩 찾았다는 무스 머리 회사원도 있었다. 하지만 많이 잦아들었다. 도시 전체를 감싼듯한 곳곳의 검은 플래카드도 봄비를 맞아 후줄근해졌고 중앙로를 따라 늘어선 대구에서 가장 비싼 세를 내는 가게들은 "이러면 망하는데"라며 걱정이 한창이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유족들은 "당장 뭐라도 바뀔 듯 북새통을 떨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가는 세상의 견고함이 두렵다"고 했다. 사람들의 망각이 두렵다고 했다.
/대구=이동훈기자 dhlee@hk.co.kr
■ 고아된 영천 3남매는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한 달이 지났지만 젊은 엄마가 죽어가며 남긴 말은 여전히 뭇사람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어무이. 불이 났는데 못나갈 것 같아예. 애들 잘 키워 주이소."
14일 그녀가 부탁한 3남매를 만나러 경북 영천시의 사과나무 촘촘한 밭을 낀 작은 마을을 찾았다. 첫째 수미(7)와 둘째(6)는 학교와 유치원에 가고 집에 없었고 네살배기 막내 손자만 고 박정순씨의 시어머니 황정자(62)씨의 치마 자락을 붙잡고 따라 나왔다.
지난해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숨지고 어머니 마저 이번 참사로 잃은 3남매에게 지난 한달간 여기 저기서 장학금을 주겠다, 생활비를 보내겠다는 관심이 많았다. 한편으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고 했다. "내가 버젓이 살아있고 삼촌, 고모도 여럿인데 '애들을 키워주고 싶다' 거나 '입양할 생각 없냐'는 턱없는 소리를 해댔다"고 할머니는 역정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3남매는 겉으론 정상을 되찾았다. "막내는 천방지축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둘째는 아는둥 모르는 둥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첫째 수미는 이불 덮어쓰고 몰래 훌쩍 거리며 알 것 다 아는 눈치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채 한다"고 했다. 참사후 며칠간 곡기를 끊었다는 할머니는 "이젠 밥도 묵고 합니다"라고 했다. 이런 관심, 저런 도움 필요 없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 겠다고 할머니는 다부지게 마음 먹은 것이다. "그 경황에 얘들 챙길 생각을 우째 했는지. 그걸 생각해서도 내가 오래 살아야지."
/영천=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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