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교민들이 수십년에 걸쳐 이룩한 결실을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만든 1992년 4·29 흑인폭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인들에 대한 미국 주류 사회의 특혜 때문도 아니고, 한인들의 흑인에 대한 무시 때문도 아니었다. 흑인폭동의 바람이 지난 뒤 많은 학자들은 그 주범을 미국의 주류 언론이라고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당시 백인 경찰이 흑인 청년을 폭행한 '로드니 킹 구타사건'으로 흑백 갈등이 폭발 직전으로 치닫자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흑인들의 분노를 돌릴 희생양을 찾았고, 마침 LA의 상권을 장악해 가던 한인들이 그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비록 흑인폭동은 한인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한인들이 주류 사회 진출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한 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존 유 한미연합회 4·29센터 소장은 "특히 주류사회에서 한인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한인들의 언론계 진출이 본격화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미국 주류 언론계에서 필명을 떨친 한인 기자는 이경원(75)씨가 유일하다. 이씨는 동양인 최초의 미국 기자이기도 하다. 고려대 영문과 졸업 후 1950년 미국으로 유학온 이씨는 웨스트버지니아대와 일리노이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1955년 킹스포트 타임스 기자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75년 새크라멘토 유니온지 기자시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한인 청년 '이철수씨 사건'을 보도, 무죄 석방을 이끌어냈고 소수 민족에 대한 미국인들의 차별의식에 경종을 울렸다. 또 애팔레치안 탄광 광부들의 진폐증 실태를 고발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40여년간 기자로서 현장을 누비며 굵직한 특종기사들을 보도해 온 그는 이같은 공로로 아시안언론인협회로부터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AP통신, 내셔널 헤드라이너스 클럽 등으로부터 29차례에 걸쳐 기자상을 받았다. 그리고 제임스 레스턴, 테드 터너 등과 함께 미 언론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500여명의 언론인으로 선정돼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의 '언론인 500명'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이경원씨는 천생 사건기자다. 지금도 취재수첩과 볼펜 등 취재용품을 양복 상의 주머니에 불룩하게 넣고, 전화를 받으면 언제, 어디로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미국내 한인들의 언론계 진출도 적극 돕고 있다. 직접 한미언론인협회를 창설해 한인 언론인들의 조직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물론 미국내 대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한인 언론인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언론장학생을 모집해 언론계 진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미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은 뉴욕에 있는 매스 미디어들"이라며 "한인 1세대들은 자녀들에게 이제 의사, 변호사 타령만 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정치의 중심은 워싱턴이지만 뒤에서 미국의 정책방향을 좌우하는 건 바로 거대 신문사들이고, 특히 뉴욕타임스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합니다. 이번 북핵 문제에 있어 한미관계의 방향은 뉴욕타임스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주류사회 언론에서 활동하는 한인 기자는 약 300명 정도. 특히 발행부수 350만부로 미국 최대 대중잡지인 '피플'지의 편집장에 오른 재미교포 2세 여성 지니 박(한국명 박진이·41)씨는 주류사회에서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월터 먼데일, 제럴딘 페라로 민주당 대선 후보 진영에서 정치수업을 받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영부인인 로라 부시가 미국 주요 여성 언론인 10명을 위해 마련한 백악관 오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 밖에 워싱턴포스트의 피터 배(39)기자가 민완 기자로 명성을 얻고 있고, CNN 헤드라인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 소피아 최씨도 유명하다. 사진기자로는 미국 언론인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2년 연속 수상한 AP통신의 강형원(39)기자와 역시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타임스 이장욱(34)기자가 있다. 한미언론인협회는 미국의 핵심 언론사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는 한인 언론인이 50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달 23일 스미소니언 아시아 태평양 프로그램은 워싱턴에서 미국 주류 언론에 진출해 활약중인 한인 저널리스트들을 초청, 주류 사회에서 한인들의 역할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지니 박씨는 "한인 언론인의 역사적인 임무는 주류 사회와 한인 사회를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kimin@hk.co.kr
■ LA타임스 부사장 스티븐 리
미국 서부 지역 최대 일간지인 LA타임스는 지난 10일부터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바다를 '동해'(East Sea)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아직 '일본해'(Sea of Japan)와 병기하는 단계지만, 한인들은 한국계인 스티븐 리(41·한국명 이응석)씨가 LA타임스의 부사장으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기자 출신은 아니지만 스티븐 리씨는 한국계로는 미국 주요 언론사의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독자관리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그는 LA타임스내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수석 부사장을 맡고 있다.
리씨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이민온 1.5세다. 클레어몬트 맥케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노스웨스턴대학원에서 MBA를 받은 뒤 펩시콜라, 하인즈 등 언론과 관계없는 업종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명성을 쌓아가다 LA타임스 제프리 존슨 회장 눈에 띄어 1998년 2월 마케팅 담당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는 언론사 경영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수석 부사장 취임후 회사운영 개혁을 통해 1,600만 달러의 추가 매출을 올리고 경비는 1,300만 달러 줄였다. 지난해 5월에는 타임스미러사가 매년 발표하는 '올해의 경영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수없이 당한 인종차별을 '성공의 동기'로 삼고 있다. 그는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장점이냐"며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니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주류사회 진출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언론인으로서 성공하는 것이 한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지름길이라고 본다"며 "언론계 진출을 바라는 한인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적극 돕고 싶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 한인의 구심점 미주한국일보
한국일보 창간 15주년 기념일인 1969년 6월9일, LA에서 미주한국일보의 닻이 올랐다. 당시 LA 거주 한인은1만명 정도로 시장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졌지만, 이민사회의 태동기에 미래를 내다본 어려운 결단이었다.
당시 미주한국일보는 신문사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초라했다. 조그만 사무실에 지사장 책상 하나에 전화기 1대, 세 사람이 앉을 정도의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신문은 서울에서 보낸 본지를 받아 복사·발행하는 수준으로 4페이지를 인쇄한 후 스테이플러로 한부씩 찍어 발송했다. 그러나 고국 소식에 목말랐던 교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한 교포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1970년 2월26일부터 미주한국일보는 교포사회 소식을 취재·보도하기 시작했다. 서울 본지 지면하단 광고란에 '미국 소식'을 싣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미주한국일보는 한인사회를 하나로 이어주는 그물망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미주한국일보는 현재 LA와 뉴욕 워싱턴DC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등 미 전역에 지국망을 갖추고 한인사회 내부는 물론 한인사회와 주류사회를 이어주고 있다.
미주한국일보의 중요성은 한인사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빛이 났다. 1992년 4월29일 흑인폭동이 발생하자 미주한국일보는 바로 '코리아타운 비상구호대책위원회'를 꾸려 긴급 복구와 재건을 이끌었고, 94년 LA 대지진 때도 미국 주류 사회에 한인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 지원을 끌어냈다. 칼스테이트 LA의 유의영 교수(사회학)는 미국 사회내 소수계 신문의 역할로 이민생활의 길잡이 역할 고유문화의 보존과 계승 이민사회 역사의 기록 등을 꼽으며 "이 기능에 가장 충실한 신문이 미주한국일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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