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서울 은평구 신사동 비단산 북서쪽 기슭. 은평터널을 빠져 나와 오르막길을 오르자 "따따따", 바위 깨는 기계음이 온 산을 흔들어댔다. 산중턱부터 거의 직각으로 깎인 그곳에는 초등학교 건립 공사가 한창이었다. 굴삭기가 연신 바닥을 긁어 흙을 파냈고 덤프트럭이 공사장을 분주히 드나들었다."저 소리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아요."
'비단산 살리기 모임'의 정영조(여·46) 대표는 풀이 죽어 말했다. 뜻이 맞는 주민들과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끝내 산기슭을 내주고 말았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해 봄 비단산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소쩍새가 많이 울었다"며 "나무를 자른 지금 그 소쩍새가 다 어디 갔는지 울음 소리 한번 들을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서울시내 작은 산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동네 주민들이 편히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지만 체육시설과 불법 경작지, 등산로 때문에 녹지공간이 파괴되고 있는 것.
강서구 화곡동, 등촌동에 걸쳐 있는 봉제산(117m)은 인공 시설물로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배드민턴장이 26면 들어서 있고 평평하다 싶은 곳에는 철봉 같은 운동기구가 어김없이 설치돼 있다. 거미줄처럼 난 등산로는 갈수록 넓어져 폭이 수십m나 되는 곳도 있다. 대일고교 등산로 입구와 산곡초등학교 뒤 1,200평은 주민들이 채소를 심는다며 숲을 망가뜨렸다.
인근 우장산에는 축구장 1개, 테니스장 4면, 배드민턴장 14면, 국궁장 1개, 배구장 1면, 농구장 4면, 에어로빅장 1개가 들어서 산인지 체육시설단지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작은 산 파괴에는 공공기관도 '가담'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배수지를 건설한다며 마포구 성미산 정상의 나무를 싹둑 베어내 주민 반발을 샀다. 강서구는 2001년 말 우장산 산자락에 아파트 건설 사업을 승인했고 구의회는 지난해 6월 우장산 공원부지의 일부를 건설업체에 매각하는 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작은 산의 파괴를 막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성미산 개발 저지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나 '비단산 살리기 모임' 등은 작은 산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성과도 적지 않아 2000년 도봉구 초안산 인근 주민과 시민단체는 이곳에 들어서려는 골프연습장을 막아냈고 도봉시민회는 지난해부터 초안산 자연해설가 양성학교와 아이들 자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5억여원을 들여 자치구별 '작은산사랑회'를 결성해 지원하고 있다. 생태보전시민모임은 2000년 작은산 기초현황 조사보고서를 낸 뒤 지역별 활동가 교육과 지원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과 일부 주민들의 의식 부족으로 아직은 역부족이다. 정영조 대표는 "시의원, 구의원이 '산 때문에 지역개발 안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구청은 개발론자, 체육동호회 등의 민원에 더 신경을 쓴다"며 "작은 산을 지키려는 주민과 개발하려는 주민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동국기자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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