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국내 초역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의 역작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발행)이 국내 관련 학자들 사이에 오역 논란을 부르고 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계승해 의식 일변도이던 서양철학의 관심을 신체로 돌려 놓은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후 바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영어와 독일어 완역판이 각각 62, 66년에 나왔고 일본어판도 74년에 출간됐다. 한글판은 96년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신체론'으로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신라대 철학과 류의근 교수가 다른 외국어판까지 참조해 5년 동안 공들여 번역했다.그러나 '철학아카데미' 강좌를 통해 최근 3년 간 '메를로-퐁티 몸의 현상학'을 집중 강의해 온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는 10일자 주간 '교수신문' 서평에서 '지각의 현상학' 번역본이 메를로-퐁티 사유의 흐름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은 대목이 꽤 있는 데다 '원전과 대조할 때 확실한 오역이 상당히 많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93년 서울대에서 '현상학적 신체론―후설에서 메를로-퐁티에로의 길'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메를로-퐁티의 지각현상학 강해'라는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는 그는 대표적인 오역의 사례로 원본의 'Science'를 류 교수가 '학문'이라고 옮긴 점 등을 들었다.
조 대표는 번역본 15쪽 '나는 내가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비록 학문적 인식이라 할지라도, 나의 관점 또는 학문적 상징들이 의미 없는 것으로 되지 않는 세계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를 예로 들어 "'Science'에 해당하는 것으로 메를로-퐁티가 동물학, 사회심리학, 귀납적 심리학 등 우리식으로는 '과학'으로 분류되는 것을 제시하는데도 굳이 퐁티 자신의 철학마저 포함된 뜻을 지닌 '학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상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Science '의 번역이 '학문'이 되어 뜻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며 그는 '퐁티의 현상학이 기본적으로 인과 결정론적인 과학적 사유와 대결을 벌인다는 점을 짐짓 도외시하거나 놓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 관계대명사와 선행사 해석이 정확한 문법 구조에 따르지 않아 '우리말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번역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류 교수는 같은 신문 17일자 반론에서 "우리의 언어 감각으로 'Science'를 단순히 과학이라고 번역할 경우 일반적으로 자연과학만을 연상하며, 여타 부문을 간과하기 십상"이라며 "실재에 대한 학적 연구 과정이나 절차 또는 방법 등을 포괄적으로 담아내려면 '과학'보다는 '학문'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고 밝혔다.
'학문'이라는 개념에는 실재에 대한 인식 획득 과정, 이 과정에 사용되는 과학적 방법, 과학적 방법의 존재론적 가정과 원리, 과학자의 행동 방식과 삶의 태도까지 담고 있으므로 현상학적 관점에서 과학적 사유 태도, 방법, 원리 등을 비판하는 메를로-퐁티의 의도를 담아내는 번역으로 '학문'을 택하는 것이 '과학'보다 더 무방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류 교수는 또 관계대명사 선행사 오역 지적에 동의할 수 없으며 영어판을 보더라도 이번 번역본의 해석이 맞다고 반박했다. 덧붙여 조 대표의 지적은 번역의 결정적 오류를 예증하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며, 그가 제시한 새로운 번역문이 역자의 기존 번역과 비교할 때 번역의 다양성 또는 윤문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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