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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47>崔明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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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47>崔明鶴

입력
2003.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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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15일 해부학자 최명학이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몰년(沒年)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뒤, 1946년 함흥의학대학장을 시작으로 1956년 과학원 의학연구소장을 거쳐 1962∼65년 의학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것까지가 북한 문헌에서 확인된다.소설적 상상력으로 얽어낸 허준 에피소드 같은 것을 제외하면, 최명학은 한국 최초의 해부학자다. 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해부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로 돌아와 모교에서 가르쳤다. 박사학위 청구 논문인 '귀의 발생에 관한 연구'는 심사위원단에 의해 세계적 수준의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명학이 주로 관심을 쏟은 분야는 발생학·조직학·체질인류학 등이었다. '본방인(本邦人)의 체형학적 연구', '이(耳) 발생에 대한 신사실(新事實)', '조선인의 두폭(頭幅)과 두개지수에 대하여' 같은 논문들이 이런 관심의 열매다. 최명학의 이 논문들은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해, 일본해부학회는 1934년 그를 평의원으로 추대했다. 조선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최명학은 1930년 조선인 의사들이 서울에서 조선의사협회를 만들 때 이를 주도했다. 조선의사협회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조선인 개업의 모임인 한성의사회가 친목단체였던 것과 달리 전문학술단체였다. 조선의사협회는 1939년 일제가 의료단체단속법을 제정해 강제로 해산시킬 때까지 학술지 '조선의보'를 펴내며 일제시대 한국 의학을 이끌었다. 1936년 세브란스 의전 해부학교실 주임교수를 사임한 최명학은 고향으로 돌아가 외과의원을 열어 개업의로 일했고, 함흥의학전문학교 해부학 교수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니 그는 월북 인사가 아니라 재북 인사였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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