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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첫 신입생받은 부산 과학영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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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첫 신입생받은 부산 과학영재학교

입력
2003.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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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재(凡才)는 기가 죽어 들어섰다.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 백양산 자락. 유사이래 처음으로 나라에서 영재들을 한데 모아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며 개교한 '과학영재학교'다. 2000년 제정된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기존 부산과학고등학교를 영재학교로 꼴을 바꿨고, 올 3월 첫 신입생을 받았다. "2100년 지구 자원이 고갈돼 지구와 같은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섰다. 신의 입장에서 주어진 수치의 별 4개로 새로운 태양계를 구성하면 어떻게 될까." 영재학교 첫 신입생들이 지난해 치렀다는 3차 선발 시험문제 가운데 하나다. 각종 참고자료와 함께 9시간을 줬다지만 범재는 이해조차 힘든 문제들을 선발위원회는 들이댔다. 그것에 나름의 논리를 세우고 체계적 설명으로 한편의 논문을 만들어 대거리했던 아이들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학 과학에선 둘째 가라면 서럽다는 중1∼중3 또래 애들 중 8대1의 체로 걸러진 143명이다.입학식 다음날

6일. 사흘 일정 오리엔테이션의 첫날이었고 마침 교과서를 나눠주고 있었다. 국어 국사 외엔 하드커버 속 자잘한 영어가 잔뜩 들어찬 책들. 미국 고등학교에서 쓰는 고급 수학 과학 교재란다. 유학에 대비해 일찌감치 이런 교재를 택했다고 했다. 막 책을 받아 들고 와 기숙사 책꽂이에 정리하는 한 학생에게 "어렵지 않겠나"고 떠봤다. "영어로 써졌다 뿐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요."안경너머 묘한 미소와 함께 답이 돌아왔다.

저마다 칼 한자루씩 품은 고수(高手)들이다. '축 과학영재학교 합격 000'란 플래카드로 출신 중학교와 학원 벽을 도배하고 모였을 애들이다. 고수들은 오리엔테이션 기간 내내 서로에 대해 치열한 탐색전부터 벌였다.

"제 룸메이트는 정석수학II도 벌써 날큰날큰해요." 한 학생이 힐끔힐끔 건너편 룸메이트 책상 위를 넘겨다보며 말한다. "너도 공인 영재잖아"라고 하자 "운이 좋아서 들어왔죠"라고 말한다.

날선 탐색전은 무성한 풍문을 동반하는 법. 경시대회서 늘 1등하던 걔가 걔라더라, 누구는 수학 시험만 치면 늘 10분만에 답안지를 내고 홀연히 시험장을 빠져 나왔다더라, 누구는 남들이 6개월 공부하는 화학교재를 3일만에 독학으로 마스터해 학원강사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더라. 책 한장 안 들여다 보는데 늘 만점을 받아 왔다더라….

신입생 3분의2의 아이큐(IQ)는 140을 넘는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칠 교수진은 KAIST파견교수 6명과 기존 부산과학고 교사에 부산에서 수학 과학은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교사들이 충원됐다. 90%이상이 석사이상 학위 소지자다. 그렇지만 이들의 임전태세는 이랬다. "솔직히 두렵다."

오리엔테이션 이틀째

점심시간 짬을 내 도서관 한 켠을 차지하고 고난도 수학문제와 씨름하는 아이들이 벌써 보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안 풀면 좀이 쑤셔서"란다. 영재성의 정의는 학자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지만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무한한 집착'도 판별의 한 잣대가 된다면 이들은 분명 영재다.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보면 여느 또래 집단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손은 쉴 새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 댄다. '바이오그래피(생물)'교과서를 지급받아 가장 먼저 펼쳐드는 장(章)은 '임신 & 성'이다.

학교장의 특강 시간.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책임감을 가져달라"는 요지였다. 익숙지 않은 '12시 취침, 6시 기상'의 단체생활 탓인지, 강의가 지루했는지 태반이 존다. 아예 고개를 젖힌 학생도 있다. 한 교사는 "영재집단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선배들(부산 과학고생)에 비해 자기 표현이 분명하고 더 산만하다"고 했다.

일반 학교였다면 '왕따'였음직한 아이도 여럿 눈에 띤다. A군이 대표적이다. 인성검사 대인관계부분에서도 형편없었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고 혼자 중얼거리고 다니기 일쑤다. "뭐 하니?"라고 물으면 씩 웃는다.

입학 전 사전 연수프로그램으로 야외견학을 데려갔는데 몇몇 애들은 길을 잃었다. "자기 생각에 푹 빠지면 주위서 뭐라해도 못 들어서" 그렇단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면에선 (학교가) 대만족"이라고 했다. "수준이 안 맞아서 다른 얘들과 얘기도 안했는데, 여기는 너무 신난다"고도 했다. 응석받이로 키워졌을 얘들의 기숙사방은 개키지 않은 이부자리에 옷가지와 양말 따위가 널려있다.

공부엔 영재지만 인간관계, 사회생활에선 둔재일 수 있다. "13살부터 16살까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영재라는 추켜세움은 어찌 보면 위태롭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조화로운 인성을 갖추도록 할까. 그렇다고 기존 학교 틀로 옥죄어도 안된다."교사들은 모이면 그 고민이다. 이 학교엔 그래서 다른 학교엔 없는 전문상담교사가 따로 있다. 한 애 한 애가 아인슈타인일 수 있어 그렇단다.

수업 첫날

썩 영재학교답지는 못했다. 1년을 준비해왔지만 학생 마다 제 각각인 수강신청 탓에 여기저기 시간표의 아귀가 안 맞고 강의실의 빔 프로젝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과학도서를 1억원 어치나 구매했다는데 아직 정리되지 않아 도서관은 비어있다. 영재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지었다는 80억원 짜리 첨단 과학관 건물엔 들어와야 할 40억원 어치 실험기자재들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첫날이라지만 전국 고수들을 모아놓고 첫 대접이 영…"이라며 혀차는 이들도 있었다.

고교과정 시험(PT)을 통과해 고교 물리학은 건너뛰는 강영훈 군은 이날 KAIST파견 교수를 독선생님으로 모시고 대학 물리학 첫 수업을 했다."플랑크 상수…광속불변…물리법칙의 형식"암호를 주고받듯 사제간 첫 대면이 끝난 뒤"언제 그렇게 물리를 공부했냐"고 묻자 강군이 답했다. "중3, 2학기 들어 잠깐 공부했는데요."

첫 수업을 끝낸 안정훈 (생물학) 교수는 "아이들이 입시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티가 역력했다"며 "앞으로 호기심과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을 해나가겠다"고 했다.

수학과 박일영 교사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적어도 '오리'로는 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오리'란 적당히 날기도, 걸어다니기도, 헤엄치기도 하는, 한때는 영재였던 이들의 비유라고 그는 덧붙였다. 1983년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과학고가 현실의 입시교육과 충돌하면서 낳은 결과가 '오리 양산'이었다. 영재학교는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오리가 될지 백조가 될지. 어떤 영재든 둔재로 만들어 놓는 데는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는 우리나라 교육 제도 하에서의 첫 영재교육 실험은 시작됐다.

/부산=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이성덕기자

■ 과학영재학교 교육과정

과학영재학교 교육과정은 고등학교로는 유사이래 가장 선진적이다. 수강신청을 통해 듣고싶은 과목을 선택, 145학점 이상을 취득하면 졸업하는 무학년제다.

과목은 국어 사회 등 보통교과와 수학, 과학 등 전공교과로 나뉘고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수강만 하면 학점이 인정되는 과목도 많다.

PT(Placement Test), AP(Advanced Placement)란 제도도 두고 있다. PT란 일정 시험을 통과하면 고교 과정을 건너뛰는 것이고 AP로는 대학과정을 당겨 공부해 미리 학점을 따둘 수 있다. 입학생 중 이미 고교 수학과정을 공부할 필요가 없는 학생, 즉 수학 PT통과자는 18명이다. 이들은 KAIST 파견교수로부터 대학 수학을 배운다. 담임교사는 학생 6명당 1명이다. 'R& E'란 이름으로 연구활동도 한다. 소그룹으로 나눠 주말휴일을 이용, 자신이 택한 주제를 연구하고 1년에 한편씩 논문을 써내야 하는데 KAIST,서울대 등의 교수가 지도교수로 참여할 예정이다.

초중등교육법이 아닌 영재교육진흥법의 적용을 받다 보니 가능했다. 무엇보다 수능, 내신 등 입시부담감이 없다는 게 기존 과학고와 다른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현재 서울대 등과 수능시험을 거치지 않고 이들을 뽑는 특별전형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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