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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1) 록의 사부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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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1) 록의 사부가 된다는 것

입력
2003.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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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러나 1984년 이후 나는 록의 전도사로서 거듭났다. 첫 시도로 세웠던 라이브 록 클럽 '록 월드(Rock World)'는 사실 1년만에 망하고 말았으나 결코 허망하게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맨 먼저 한 일은 록 월드를 찾은 관객에게 록을 즐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록이든 댄스 뮤직이든 콘서트만 열렸다 하면 일어서서 환호하고 일사불란하게 야광 스틱을 흔들어 대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 만해도 아무리 열광적인 무대라도 객석은 그냥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미 8군 무대나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 실황 등에서 내가 익히 봐 오던 광경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공연장 내부 구성과 객석 배치법부터 틀렸던 것이다. 그래서 외국 록 공연에서 익히 봐 온대로 무대와 객석을 가르던 시커먼 휘장을 없앴다. 거기에 대형 앵글 빔을 설치해 300여개의 조명을 달았다. 객석 뒷편에는 조명 조절기(콘솔)를 설치해 조명 기사가 무대 위의 상황을 확인하면서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 됐지만 이런 시도 모두가 국내 최초였다. 나는 거기에다 록 공연 전문인 영국산 스피커 HH 30여개를 홀 곳곳에 배치했다. 나이트 클럽처럼 저음이 쿵쿵 울리기만 하면 최고라고 믿던 시절, 그것은 파격이었다.

그 같은 홀을 꾸미느라, 내가 갖고 있는 돈이 거덜 났다. 게다가 월 200만원의 임대료, 전기세 등 유지비에 신경을 쓰다 보니 종업원들의 월급도 주지 못 했다. 그러나 음악이 좋아 그 일에 뛰어 든 사람들이라 별 말없이 따랐다.

1∼3층의 400석 좌석에 1인당 2,000원씩을 입장료로 받았는데, 운영이 너무 어려웠다. 한 번에 손님이 10명도 안 될 때가 거의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나는 소수 정예 부대를 길러 낸다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열심히 록 공연을 볼 때의 매너를 가르쳤다. 리듬을 맞춰 박수는 어떻게 쳐야 하는 지, 손은 어떻게 흔들어야 하는 지, 어떻게 따라 부르는 지 등 매우 실제적인 수준에서 였다.

그런 것들은 이제는 당연지사다. 당시 나는 공연 시작 전 객석 앞에 나가 대표적인 몇 사람을 불러 그 요령을 가르쳤다. 나는 세 아들에게 팬 클럽을 만들라고 했다. 즐기는 법을 몰라서 쭈뼛댄다면 그 방법을 가르칠 의무가 나에게 있다고 믿었다. 200여명의 젊은이들을 모을 수 있었다. 고교 2∼3 학년, 대학 1∼2학년생들이었다.

사실 요즘 유행하는 록 공연 감상법은 그 때 내가 다 가르쳤던 것들이다. 공연 중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뛰어 나가는 방식은 금방 퍼졌다. 대표적인 곳이 파고다 공원에서 낙원상가 사이에 파고다 극장을 중심으로 생겨 난 공연장들이었다.

록은 함께 하는 역동의 문화다. 내가 록 공연 감상법을 굳이 가르쳤던 것은 젊은이들이 록 콘서트를 보고서도 가만히 있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바로 뜨겁게 살아 있는 현장성이 핵심이다.

현장 활동과 함께 나는 86년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제의해 묵혀 두고 있던 앨범 '겨울 공원'을 만들었다. 그 때 젊은 후배 구희(기타)와 최창권(드럼)을 불러 음악 여행의 결과로 얻은 작품인 '시골 처녀' 등 10곡을 취입했다.

나는 내 음악은 이제 더 이상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퇴물로 인식돼 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음반사 사람들을 대할 때면 괜히 위축돼 가는 심정이었다. 타이틀 곡 '겨울 공원'의 가사가 그 마음을 잘 말해준다. '우뚝 솟은 나무에 앙상한 가지는/찬바람이 스쳐 간 자욱인가요/차디찬 겨울 공원엔 아무도 없구나.' 그렇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위선은 더더욱 싫었다.

음반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나를 이제는 고향 산천이나 그리워 하는 늙은 뮤지션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음반의 주된 소비층인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신중현은 더 이상 모른다. 감각을 잃었다. 실력이 갔다'는 말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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