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홍대용이 베이징에 갔을 때 이야기다. 중국이 세계의 전부였던 그때 한반도의 서생이 중국에 가서 놀랄 일이 한두 가지였겠는가마는, 그는 무엇보다 베이징 유리창의 거창한 서점가와 서화포(書畵鋪)를 둘러보고 충격을 받는다. 유리창은 명대에 이미 서적과 서화, 골동품이 거래된 거대한 문화시장이었다.서적과 서화, 골동품 매매를 위한 상설 공간의 형성은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 나는 홍대용의 연기(燕記)는 물론이고 이후 연행기(燕行記)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유리창의 문화시장 묘사를 보고 늘 부러워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나 하고 말이다.
조선전기에는 유관 기록이 거의 없다가 18, 19세기 무렵에 오면, 서적과 서화, 골동품의 매매에 관한 자료가 한둘 나타난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서울 광통교의 서화 판매소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한양가(漢陽歌)란 가사를 보면,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라 하며 광통교 근처 가게에서 파는 온갖 그림을 열거하고 있다.
또 정약용이 남긴 편지를 보면, 광통교 그림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약용 주위에는 서화를 품평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정약용은 그 중 한 사람에게 "당신이 보낸 그림은 그렇고 그런 수준으로 보아 아무래도 광통교에서 사온 그림인 것 같다"고 슬쩍 꼬집고 있다. 이런 자료로 보아 대체로 18세기 말이면 광통교가 서화를 걸어놓고 판매하는 곳이 되었음을 알 만하다.
광통교는 지금 있지만, 동시에 없다. 청계천 복개 때 묻혔기 때문이다. 어둠에 갇힌 광통교는 지금 모형으로 축소되어 조흥은행 본점 앞에 있다. 서울 시민들은 무심코 지나갈 뿐 챙겨보지는 않을 것이다.
유물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선죽교는 그냥 돌다리가 아니다. 고려와 조선의 교체, 정몽주의 충절이 묻어 있다. 마찬가지로 광통교는 그냥 광통교가 아니라 그림 시장이란 문화사적 사건과 함께 존재하는 다리다. 조선시대 서울 시민들이 대보름날 답교놀이를 하던 풍속사적 의미가 담긴 다리이기도 하다.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한다.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광통교는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지상으로 나오기 어렵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광통교가 만들어진 것은 1410년이다. 600년의 역사를 가진 유물을 묻어버린 것도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거니와, 이제 광통교 없는 청계천 복원이라니, 정말 무슨 소린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땅속에 있는 유적을 돈 들여 파내어 보존하는 판에 멀쩡한 유물을 파묻다니, 혹여 남이 알까 두렵다. 애달프다, 광통교여. 안타깝다, 광통교여. 칠흑같은 어둠에 묻힌 광통교여, 오수에 몸을 담근 광통교여.
강 명 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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