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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19) "세 나그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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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19) "세 나그네" 시절

입력
2003.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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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중반, 나는 뮤직 파워를 해체했다. 그것은 동시에 도시와 인간에 대한 이별의 선언이었다. 뮤직 파워가 뜨고 나서 대중이 보인 반응이 너무나 미약했다는 것이 길을 재촉했던 현실적 이유였다. 마침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12인승 봉고는 나의 듬직한 동반자였다. 나는 뜻이 맞는 친밀한 동료들의 의향을 물었다. 밴드 멤버 중 가까웠던 이남이(베이스), 서일구(드럼)가 기꺼이 나를 따르겠다고 했다. 차에 오르면서 내가 일행을 돌아다 보며 내뱉었던 "세 나그네"라는 말은 우리 일행에게 그렇게 어울릴 수 없었다. 자연스레 우리의 이름이 됐다.산길까지 속속들이 들어 갈 수 있는 승용차, 12 볼트로 작동되는 소형 앰프, 전자 기타, 전자 베이스, 전자 드럼. 꼭 필요한 장비에 정예 멤버들, 그룹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성으로 우리는 두려울 게 없었다. 모두 식솔이 있었으나 우리에겐 음악이 먼저였다. 돈에 얽매여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상황은 생각조차 못 할 일이었다. 현실은 그렇지 못 했기에 꿈을 향한 열정이 뒤늦게 불붙었던 것이랄까.

거기에 뜻밖의 동행자까지 붙었다. 평소 나를 따르던 이태원 일대의 음반 장사 4명이었다. 봉고를 비집고 들어 온 그들은 "우리도 잠수함에 태워달라"고 말했다.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릴만큼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처없이 가다보니 경북쪽이었다.

길인지 내(川)인지 분간 하기 힘들었다. 유흥가 네온 사인만이 요염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서 묵고 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곡을 쓰러 가는 길이다. 그럴 양이면 돌아가라"며 입을 막았다. 자꾸만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 가던 나는 길이 끊기자 더 이상 도저히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텐트 칠 곳을 찾던 우리는 거기서 절 표식이 그려진 팻말을 보았다.

할머니와 젊은 비구니 등 두 명만이 기거하고 있는 암자였다. 하룻밤 신세질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쌩긋 미소를 띠며 허락하던 그 순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일행이 많아도 들라"는 말에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씩 마신 뒤, 텐트와 차에 나눠 잠을 청했다. 거기서 이틀 동안 머무르며 너댓곡을 썼다.

'내', '떠나는 사나이', '바다' 등 자연을 노래하는 곡이 절로 씌어졌다. 냇물 소리가 좋아 텐트 안에서 순간적으로 작곡했던 '내' 같은 곡은 장조다 단조다 딱 구분되지 않는 내 음악(modal rock)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냇물아 어디로 가니/나는 네가 좋아 왔는데/너는 어디로 가니'라는 소박한 가사로 7분여 동안 이어지는 그 작품은 당시 세파에 지친 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앨범 '세 나그네' 수록).

여정은 계속됐다. 동해로 가기로 한 우리 셋은 먼저 이태원 사람들을 다 돌려 보냈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 때문에 나도 밤이 되면 술을 따라 마셨던 것이다. 술이 한 번 들어가니 동해 바닷가 횟집에 이르러서는 밤새 술을 들이키게 됐다. 그 집 딸의 방인줄도 모르고 곯아 떨어진 다음날 아침, 내 세수물을 떠주는 딸의 모습에서 나는 그동안 잊고 산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게 됐다. 거기서 지은 곡이 '시골처녀'다(앨범 '겨울 공원' 수록). 우리의 여정은 그 후 강원도 심산계곡을 헤매며 40여일 더 이어졌다. 8곡의 신작이 나왔다.

서울로 돌아 온 우리는 83년 11월 킹레코드사의 주선으로 동부 이촌동의 서울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대마초의 악몽과 다시 맞닥뜨려야 했다. 레코딩 작업이 처음이었던 한 멤버가 녹음의 긴장을 풀려고 몰래 대마초를 피우고 스튜디오에 들어 왔던 것이다. 당연히 템포는 엉망이 됐고 비싼 돈을 주고 한 곡도 녹음하지 못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부랴부랴 '더 맨' 시절부터 알던 주자를 불러 녹음을 끝냈다.

그러나 회심의 작업에는 마가 끼어 있었다. 제작 준비부터 삐걱댔다. 오랜 동지였던 킹박이 새 음반의 파트너라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 냉철한 사업가일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눈에는 그 작품들이 대중에게 먹혀들 수 없다고 판단된 것이다. 디스코 같은 유행 댄스 음악이 아닌 내 작품들에 투자할 수 없다는 입장은 단호했다. 록의 시대는 가버렸다는 사실을 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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