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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2> 관세음의 화신 수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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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2> 관세음의 화신 수월

입력
2003.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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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근본 뜻은 무엇입니까."(무제·武帝) "텅 비어 아무런 성스런 것이 없습니다."(달마·達磨) 이해 못한 무제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526년 중국으로 건너간 선의 시조 달마가 불심천자로 불린 양 나라 무제와 첫 대면에서 나눈 대화다. 여기서 불식(不識·모른다)의 선어가 탄생했다. 불식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만 선문에서는 사고가 미치지 못하고 말 길이 끊어진(언려불급 언어도단·言慮不及 言語道斷) 세계를 일컫는다. 달마는 집착과 분별에 사로잡혀 성속과 유무의 대립적 사고에 익숙한 무제를 깨우치기 위해 불식을 사용한 것이다. 불식은 알고 모름의 분별의식을 초월한 말이다.경허회상(鏡虛會上)에서 생사번뇌의 바다를 건넌 수월음관(水月音觀·1855∼1928)은 잠적한 스승과 해후했을 때 달마와 무제의 문답을 연상시키는 짧은 대화만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둘의 해후는 1910년 함남 갑산군 웅이방 도하동 서당에서 이뤄진 것 같다. 전해오는 말로는 문밖에서 부르는 수월의 목소리를 들은 경허는 "누구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수월입니다"라는 대답에 경허는 "모르오", 이 한 마디를 던지고 입을 닫았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누구냐'는 물음은 '나는 누구일까'라는 불교의 근본문제와 연결된다. '수월입니다'는 수월이 아님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모르오'는 바로 달마의 불식에 다름 아니다.

수월의 일대기 '달을 듣는 강물'을 쓴 김진태(金鎭太)대검중수부 2과장은 "수월이 서당에 나타난 것은 스승의 살림살이를 한눈에 셈해 보고자 함이었고 경허가 갑산에 몸을 숨긴 것은 그를 알아볼 밝은 눈을 기다렸음이 아닐까"라며 "수월은 '모르오',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그 멀고 험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 한 마디는 경허의 결론이었고 수월의 바다였다. 이제 수월이 할 일은 모름의 바다가 되어 끝없이 출렁이고 끝없이 노래하는 일뿐이다"고 적고 있다.

수월은 혜월혜명(慧月慧明) 만공월면(滿空月面)과 함께 경허의 세 달로 불린다. 법호나 법명에 월자가 들어있기도 하지만 내로라 하는 경허 제자중에서 셋이 그만큼 뛰어난 그릇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월의 깨달음은 화두참구를 통한 선가의 전통적 수행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경허는 수월에게 자비의 바다에 들어가 주인이 되게 하는 천수경, 그 중에서 관세음의 주문인 대비주(大悲呪·일명 대비심다라니· 大悲心多羅尼)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게 했다. 조사의 지혜를 타고난 제자의 근기를 꿰뚫어 본 것이다. 천수경은 스님이 되려면 누구나 외워야 하는 필수기초과목이자 자비의 경전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게 온몸을 던져 깨달음의 문을 열겠다는 노래다. 관세음은 천수천안을 갖고 있다. 손과 눈이 천 개씩이나 된다. 중생의 고통을 살펴 어루만져주기 위함이다. 관세음의 구세의 그물은 자비다. 중생을 사랑해 기쁨을 주는 것이 자(慈)이고 가엾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고 한다.

수월이 대비심삼매를 얻은 해는 1887년으로 짐작된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 끝에 스물아홉 뒤늦은 나이로 산문에 들어선지 4년만의 일이다. 불변의 문을 넘어선 수월은 한번 보거나 들으면 잊지 않았고, 앓는 이들을 고쳐 줄 수 있는 신통력을 얻게 됐다. 수월은 저잣거리의 이름 모를 중생에게 감로의 비를 뿌렸다. 한번도 그럴듯한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수월의 행장에 빈 곳이 많은 까닭은 그의 이런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글을 모른다는 점도 보태진다. 그러니 오도가나 임종게를 남겼을 리 없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최상의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더할 나위 없는 향기 되네

아름다운 그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청정한 그 성품은 영원한 법신일세

面上無瞋供養具(면상무진공양구)

口裏無瞋吐妙香(구리무진토묘향)

心裏無瞋是珍寶(심리무진시진보)

無染無垢是眞常(무염무구시진상)

수월의 삶은 이 선시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자비의 감로를 한껏 머금은 수월은 금강산 유점사를 찾았다. 그는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날 나무 한 짐을 해다 놓은 수월은 그 위에 앉아 자비삼매에 빠져들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나오던 주지가 수월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산문 밖으로 나가 보시지요. 인연이 깊은 시주가 오고 있습니다." 수월이 눈을 뜨고 말했다. 주지는 반신반의하며 산문을 나섰다. 과연 기품이 넘치는 초로의 부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김성근판서의 부인이었다. 까닭 모를 병을 앓아오던 부인은 수월의 이적(異蹟)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행방을 알아보다가 유점사로 들어갔다는 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선 것이었다. 부인은 도중에 계곡의 맑은 물소리에 끌려 가마에서 내렸다. 바위에 앉아 합장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월이 삼매에 든 그 시간이었다. 기도를 끝낸 부인은 갑자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병이 나았음을 느꼈다. 부인의 설명을 들은 주지는 나무꾼이 바로 수월임을 알았다. 수월을 찾았지만 이미 절을 떠난 뒤였다.

수월은 스승의 열반 소식을 예산 정혜사의 혜월과 만공에게 서신으로 알린 뒤 만주로 떠났다.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반야의 씨앗을 뿌리던 수월은 1921년 나재구(羅在溝) 송림산으로 들어가 조선인들이 지은 화엄사에 주석했다. 초라한 절이었지만 수월에겐 더할 나위 없는 도량이었다. 깨달음의 길을 찾아 머나먼 조국 땅에서 온 후학들을 만나는 기쁨도 컸다. 훗날 한국불교의 대선사로 빛을 발하는 금오(金烏) 효봉(曉峰) 청담(靑潭)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수월은 일흔 넷이 되던 1928년 여름 열반에 들었다. "개울에 가서 몸 좀 씻겠네." 하안거를 끝낸 이튿날 수월이 남긴 이 말이 임종게였던 셈이었다. 목욕을 마친 수월은 바위에 알몸으로 앉아 물에 뜬 강처럼 살아온 걸림 없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좌탈(坐脫)의 자세로 법신으로 다시 태어난 수월 앞에 모여선 대중의 귓가에는 그가 늘 독송하던 천수경이 맴도는 듯했다.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얼마나 애달팠으면

천의 손이 되셨을까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천의 눈을 하셨을까

이기창 현집위원 lkc@hk.co.kr

■ 수월과 만공의 법거량

어느 날 수월이 사제 만공과 한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숭늉그릇을 들어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여보게 만공, 이 숭늉그릇을 숭늉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 마디로 똑바로 일러 보게."

만공이 숭늉그릇을 들어 문 밖으로 집어 던지고는 말없이 앉아 있자 수월이 말했다.

"잘 혔어, 참 잘 혔어!"

만공이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든 이는 한갓 형상에 얽매인 대답에 지나지 않는다. 이 법거량(法擧揚)은 두 사람 모두 집착에서 벗어나 지혜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경지에 들어갔음을 말해준다. 깨달음의 심지를 시험해보는 법거량은 다양하다. 수월과는 전생에서부터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듯 싶은 관세음에 얽힌 화두를 보자. 중국 당시대의 선객 도오(道吾·769∼835)와 운암(雲巖·780∼841)의 이 법거량은 '운암대비천안(雲巖大悲千眼)'의 화두로 전해진다.

운암이 사형 도오에게 법담을 건넸다.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고 있는데 그 걸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밤에 자다가 베개를 놓쳤을 때 더듬어 찾으려고."

"알았습니다."

이런 건방진 놈이 있느냐는 듯이 도오가 소리쳤다. "알긴 무엇을 알아!"

눈 하나 깜짝 않고 운암이 말했다. "온 몸이 다 손이며 눈입니다."

도오는 제법이다 싶었다. "열에 여덟까지는 갔다만 아직 멀었다."

운암은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럼 사형께서 한 번 말해 주십시오."

도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온 몸이 손이고 눈이지."

운암의 대답은 우주의 법계가 다 관세음의 손이고 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답을 내놓고도 "아직 멀었다"는 도오의 덫에 걸려 "그럼 사형께서…"의 사족을 달았다. 선의 세계는 이처럼 한 순간을 놓치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안과 밖에 머물지도 않고 가고 옴이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이 저절로 사라져야 삶과 죽음이 서로 다름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튼 이 법담을 나누고 헤어진 수월과 만공은 이승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수월은 이후 법은을 베풀어준 스승 경허의 행적을 찾아 북방으로 유랑의 길을 떠난다.

■ 연보

1855 충남 홍성 출생. 수월은 법호, 음관은 법명

속성은 전(田)씨이며 속명은 전해지지 않음(전·全씨라는 설도 있음)

1883 서산 천장암에서 출가

1887 대오

1888∼96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의 사찰에서 수행 및 만행

1907∼12 경허의 행적 찾아 함경도 일대 유랑, 이후 만주로 건너감

1921 만주 왕청현 나재구 송림산 화엄사에 주석

1928.7.16 화엄사에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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