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수가 떠나고 나서 그룹이 깨지자 머리가 아팠다. 한 번도 뒤를 돌아 볼 생각을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 때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장현이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그는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간부로 일한다며 언제 한 번 놀러 오라고 했었다.1970년 그를 찾아 대구로 내려갔다. 반갑게 맞아 준 그는 나에게 대통령이 오면 쓴다는 제일 큰 방을 거저 내줬다. 머리 식히며 곡도 쓸 겸 한 일주일 푹 쉬라는 말과 함께.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울에 오면 취입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서울로 떠났다.
올라 간 나는 먼저 그를 불렀다. 그래서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준 노래가 '기다려주오'였다. 이후 '나는 너를', '미련' 등 석장의 음반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주었다. 그 무렵 장현은 내 사무실에 와 살다시피 했다.
그의 히트 곡은 '석양'과 '미련'이다. 두 곡 모두 장현이 처음 불러 히트 시킨 것으로 알기 쉬우나 원래는 임아영이 한 해 전에 먼저 불렀던 곡이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 해 두 곡을 히트시킬 가수를 찾고 있던 내게 때마침 장현이 온 것이다. 장현은 나를 끈기 있게 따라다녔다.
석장의 판을 낸 그도 어느날 말없이 떠났다. 그리고는 연락 한 번 없었다. 사실 그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다른 가수들도 내가 시킨 대로 한 것이지만 음악적 깊이도 별로 없던 그가 한 순간에 '스타'로 뜬 후 연락을 끊어버리자 그 후로는 가수를 상대하기가 싫었다. 장현 외에도 내 사단의 남자 가수로는 '더 맨' 시절 발탁한 가수 박광수와 윤용균 등이 있으나 대중적 지명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장현을 떠올리면 아직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수성관광호텔에 머물 때 그가 "숙박비 같은 것들은 내가 내긴 내는데, 선생님은 사인만 꼬박꼬박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속뜻은 그가 말 없이 떠난 뒤 밝혀졌다. 법원에서 난데 없이 날아 든 출두 명령서가 그 답이었다. 가 보니 내가 그 호텔에서 무단취식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려와 사진을 찍고 난리였다. 톡톡히 창피를 당한 셈이다. 담당 판사는 웃으며 "연말까지 내라"고 명했지만,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75년 '대마초 사건'이 터지기 직전, 나의 마음은 이래저래 황량할 수 밖에 없었다. 나라는 존재의 고독감은 서두에 이야기한 대마초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대마초 사건 이후 성질이 날카로워진 나는 가끔 아끼던 기타를 무대에서 부숴버리거나 벽에 대고 깨뜨렸다. 그 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들의 해금이 풀렸다. 출소 이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나는 종로 5가 록 클럽 '소울 트레인' 사장의 부탁으로 새로 결성한 그룹 '뮤직 파워'와 함께 공연하고 있었다. 그 곳은 내 최초의 록 공연장이 된 셈인데, 어느날 광적으로 연주하다 흥에 겨워 객석 한 가운데로 기타를 던지고 말았다. 다행히 다친 손님은 없었으나 한 손님이 그 기타를 주워 가려고 했다. 사회자가 얼른 내려가 그 손님에게서 기타를 뺏다시피 가져왔다. 이후 무대에서 열기가 오르면 나는 계속 기타를 객석으로 던졌고, 항상 누군가가 대기하다 갖고 왔다.
그 해프닝이 알게 모르게 관례화됐던 당시 4개월간이 나에겐 음악적으로 절정기였던 것 같다. 지미 헨드릭스, 후 등 전위적 로커들의 음악과 연주 행태가 나의 몸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 당시 폭발했던 것이다. 그것은 억압과 위선과의 결별이었다. 록은 그래야 한다는 믿음은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되돌아 보면 활동금지의 쇼크는 너무 컸다. 허망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끝나나"하는 오기도 없지 않았다. 나는 새 시대의 변화한 음악성으로 다시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뮤직 파워'를 결성했고, 록과 디스코의 결합을 시도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짓이었다. 멍청해야 할 수 있는 댄스 뮤직인 디스코에 록의 정신을 담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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