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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교수의 진료실 풍경]<2> 고혈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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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교수의 진료실 풍경]<2> 고혈압

입력
2003.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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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처외삼촌이 계셨는데 50대 후반에 국가에서 설립한 연구소의 소장이 되셨다. 당신이 평생 원하던 자리를 얻게 되어 자신감이 넘치셨다. 여러 해 전 추석 다음날 우연히 처가에서 만나 뵈었는데 대뜸 "아, 서서방. 내가 고혈압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해?"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야 혈압약 드셔야지요"했다. 그랬더니 "의사들은 다 똑같애" 웃으시면서 말을 끊으셨다. 평소에 자주 뵙던 분도 아니고 어려워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같이 웃어 넘기고 말았다.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전화가 왔다. 처외삼촌이 쓰러지셔서 모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중인데 위독하다고 하니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가보니 하필 숨골 근처에서 혈관이 터져 수술도 못하니 집으로 모시라는 것이었다. 뇌출혈의 가장 흔한 원인은 고혈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당시에 좀 더 상세히 말씀드렸더라면 하고 가슴을 쳤으나 이미 후회막급이었다. 당시 처외삼촌은 딸이 고3, 아들이 고1이었다. 수능시험이 한 달 앞으로 닥치고 있었고, 인생을 좌우하는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의 죽음을 겪도록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병원의 퇴원 압력을 처외숙모가 사정사정해서 거의 4개월을 끌어 2월 중순 딸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야 퇴원하였다. 인공호흡기를 떼자마자 처외삼촌은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렀다. 중환자실 입원비는 살인적이어서 수천만원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만 있으면 아깝지도 않았으리라.

수년 후 대학을 졸업한 딸이 결혼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서서 신부를 인도해야 할 자리에 신부의 큰아버지가 서 계셨다. 신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한 사람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게 되는 순간은 그 사람이 있어야만 할 자리에 보이지 않을 때다.

만약 처외삼촌이 평범하게 하루에 한 알 또는 두 알의 고혈압약을 매일 드셨더라면, 지금도 당신이 좋아하던 분야에서 큰 소리 치면서 일하셨을 터이고, 은퇴하신 뒤라도 친구들과 등산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실 터이고, 딸아이 결혼식에도 참석했을 터이고, 손주들의 재롱도 보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홀로 사시는 처외숙모는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재미가 없다고 하신다. 고혈압에는 '절반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고혈압 환자의 절반만 자신이 고혈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중 절반만이 약을 먹으며, 그 중 절반만이 충분히 조절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따지면 고혈압 환자의 12.5%만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셈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고혈압이라는 질병을 수천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혈압은 1828년 푸아죄이유에 의해 처음 측정되었다. 그 방법은 너무 복잡해서 일반인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1905년 코르토코프가 지금 사용하는 것과 거의 똑같은 청진기를 이용하여 혈압을 측정하는 혈압계를 만들고 나서야 간편하고 정확하게 혈압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인간이 혈압을 제대로 측정한 것은 100년이 채 안 된다. 더구나 혈압을 측정하기 시작한 뒤에도 고혈압이 하나의 병이라는 생각은 소수의 의사들만 주장했을 뿐이었으며 고혈압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은 70년대의 일이었다. 또한 고혈압을 약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은 1951년이었으니, 고작 5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지금은 효과적이고, 간편하고, 부작용이 적은 고혈압 약제가 수백종류 시판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이 좋아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흔히들 고혈압 환자들이 약을 평생 먹는 것이 싫어서 약을 안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 밥은 평생 먹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그것도 세끼를!!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평생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절망해서 밥 먹기를 거부하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고혈압 약, 하루에 한번이면 충분하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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