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이창동(李滄東·49)씨가 새 정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된 지난달 27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과 문화개혁시민연대(문화연대)는 이례적으로 환영성명을 냈다. 이씨가 현장에서 영화감독으로서 보여준 개혁성향에 대한 큰 기대를 걸고 있고 문화 기득권 세력과 구시대적 행정의 부당한 개입을 차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과거 체제 비판적인 문화계 '운동권' 인사들이 주도하는 이들 단체가 새롭게 문화계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 권력'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이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단순히 얼굴만 바뀌는 게 아니라 문화정책의 방향과 성격 등에서 근본적 변화를 부를 조짐이다. 이런 변화를 두고 당사자들은 '시민사회의 정당한 참여'라고 말하지만 '문화계의 정권교체'라는 시각도 무성하다.
변화는 이미 예견됐다. 민예총 회원으로 배우인 문성근(文盛瑾·50)·명계남(明桂男·51)씨가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자문위원에도 박인배(朴仁培)민예총 상임이사, 조한기(趙漢起) 전 문화정책연구소 사무국장, 이기택(李起鐸) 전 민예총 남북문화예술교류위원회 위원장이 들어갔다.
지난달 문화예술인 지원 업무를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에 현기영(玄基榮·62)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 위촉됐다. 문화계 권력이동의 예고편이었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입각, 진보적 문화계 인사들의 득세가 본격화했다. 19일 임명될 국립중앙박물관장, 8월에 교체될 국립현대미술관장도 민예총과 문화연대 출신 인사가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1급 상당의 개방형 임용직으로 공모했다가 차관급으로 승격되면서 임명직이 돼 버린 중앙박물관장에는 유홍준(兪弘濬·54) 전 문화연대 대표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현대미술관장에도 민예총 산하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출신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김윤수(金潤洙·67) 이사장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영화계 주도권도 영화인협회(회장 김지미)에서 문성근 명계남씨 등이 이끄는 '영화인회의'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흐름이 한결 확고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스크린쿼터축소 반대운동이 힘을 얻고, 영상물 등급심의위원회도 개혁대상으로 떠오르고, 저예산 독립영화 등에 대한 지원이나 대종상의 공정한 집행 등이 당장 영화계의 현안으로 떠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홍덕률(洪德律·46)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화예술계의 권력교체'라고 단언했다. 그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주류에 대한 도전 에너지가 그 동안 정치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가 대선을 통해 각 분야에서 동시에 분출됐다"며 "문화예술계도 권력의 기반과 성격, 그 주체와 행사 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민예총에 맞서는 보수 성향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해 온 단체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의 김종헌(金鐘憲) 사무총장도 "700명에 이르는 인수위 전문·자문위원에 예총 출신이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공개석상에서 예총이 수구 기득권 단체로 몰리는 등 시대변화를 절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세력은 '권력 재편'이란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이 장관은 취임하는 날 기자간담회에서 "권력이동으로 보는 관점은 지난 시대의 패러다임에 따른 것으로 국민의 합리적 가치에 반한다"고 밝혔다. 심광현(沈光鉉·47) 문화연대 문화개혁감시센터소장(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도 "최근 문화단체장의 선임은 문화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일부 세력의 독점이 해소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계에서의 진정한 권력은 투자·배급을 독점하고 있는 영화사, 거대 화랑, 거대 출판사에 있으며 그런 구도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991년 펴낸 '권력이동'에서 권력의 세가지 원천을 폭력과 부, 지식이라고 규정하고 21세기의 권력 투쟁에서는 지식을 장악한 세력이 승리한다고 내다 보았다. 지식·문화의 힘이 폭력과 부마저도 무력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문화예술계도 인터넷 혁명을 통해 그런 흐름을 타고 있고 선두에는 영화 등 대중문화가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시민단체도 공공 영역의 한 축을 맡게 될 것이다. 문화관광부가 최근 민간 주도로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기 위해 '행정문화개혁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한 것은 그 첫번째 가시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 이창동 영화인맥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문화계 삼각 편대인 이창동(49) 문성근(50) 명계남(51). 세 사람은 영화 '그 곳에 가고 싶다'를 통해 한 자리에 모였다.
경북대 사범대 국문과를 다니며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이창동씨가 서울에 올라온 것이 1982년. 상경 직후 그는 우연한 자리에서 연세대 연극반 출신인 명계남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술자리에서 의기 투합했고, 이후 이창동은 소설가로 등단했다. 서강극회에서 활동하던 문성근씨는 연대극회에서 활동하던 명씨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영화를 공부하려던 이씨는 '칠수와 만수'의 각색자인 친구 최인석씨의 소개로 박광수 감독을 만났고, "현장 경험 없는 유학은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조언을 듣고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조감독이 됐다. 문성근씨는 영화의 주인공이었고, 조감독의 추천으로 명씨도 처음으로 영화에 얼굴을 내 밀었다. 세 사람에 여균동 씨가 합세해 '이창동 데뷔 추진위원회'라는 우스개 섞인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고, 마침내 97년 '초록 물고기'의 제작자(명계남), 감독(이창동), 배우(문성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스트필름'(대표 명계남)에 영화 제작 자금을 지원한 '전주' 염태순(49·신성통상 대표이사 회장)씨. 당시 국산 가방 '아이찜'으로 시장을 석권한 (주)가나안의 사장이었던 염씨는 서강대 서강극회에서 만난 문씨의 단짝으로 그의 적극적인 권유로 30억원을 투자, 문화투자사인 '유니코리아'의 자금담당 이사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이창동 감독의 영화 세 편이 모두 이스트필름 제작, 유니코리아 투자 영화이다.
이창동 감독의 문화부 장관 취임 후 그와 인연이 깊은 두 사람의 '간섭'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은 명필름 공동대표는 "문성근씨나 명계남씨 중에 한명이 장관이 됐다면 '간섭'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감독은 지략가, 문·이씨는 행동가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새 정권 출범과 함께 영화감독 출신이 문화관광부 장관이 됐다. 한국 문화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문화부 장관은 정치인이 주로 차지했다. 더러 문화예술인이 맡더라도 순수문화 쪽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대중문화 쪽에서 장관이 나온 것이다.
문화는 그 동안 '권력의 시녀'가 아니면 '경제의 도구'였다. 하지만 최근 문화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런 고정 관념에 제동이 걸린 느낌이다. 아니 이제는 문화가 정치·경제를 변화시킬 힘을 가진 듯하다. '오노 사건', '붉은 악마와 길거리 응원', '촛불 시위', '노풍' 등 지난해의 주요 사건을 생각하면 모두 문화적 역동성의 결과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문화가 중요해진 것은 물론 한국자본주의의 발전 때문이다. 고도의 소비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문화산업이 크게 팽창하고, 대중문화의 상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지난 대선에서 20·30대가 결정적 영향력을 미친 것도 이들이 새로운 문화지형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를 능란하게 다루는 세대가 문자문화에만 익숙한 50·60대의 힘을 압도한 것이다.
문화예술인 출신 문화장관의 등장은 시작일 뿐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문화권력을 독립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자칫하면 문화를 문화관료, 문화전문가, 문화직능단체에 종속시킬 가능성이 있다. 문화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거꾸로 문화 내부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지배질서가 생긴다는 것은 아방가르드 이론이 일찍이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문화권력의 이동보다는 민주화이다. 문화예술계, 시민사회, 신세대 쪽으로 문화권력이 일부 움직였다고 문화의 발전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지금 한국문화는 지나치게 소비자본주의에 종속돼 있고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시장개방 압박에 직면해 있다. 영화 등 잘 나간다는 문화산업도 스타나 자본만 호시절일 뿐 문화노동자 대부분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대중의 문화향수권이나 삶의 질도 아직 형편없다.
문화권력을 민주화하고 개인과 집단의 문화적 권리를 신장·확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좋아만 보이는 신세대의 문화적 역동성도 소비문화에 포박된 징후인지 모른다. 이들을 포함, 더 많은 사람이 자율적으로 문화를 가꿀 수 있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이런 노력이 지금 문화예술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가치를 사회운영에 반영시키는 한편으로 WTO의 문화시장 개방 요구에 맞서 문화주권과 문화다양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시민과 민중의 문화적 권리를 지키려는 이런 노력을 지속해야 한국사회는 소비문화의 그것과는 다른 유형의 '문화의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다.
강 내 희 중앙대 영문학과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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