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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16) 슬픈 영혼의 가수, 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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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16) 슬픈 영혼의 가수, 박인수

입력
2003.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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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단 최초의 남자 가수 박인수가 절창하던 그 모습을 영영 잊지 못 한다. 두 손으로 뭔가 쥐어 짜 올리는 듯한 특유의 무대 매너, 거기에 완벽한 흑인 영어 발음 등 박인수는 그야말로 한국화된 흑인이었다. 그와 맞닥뜨린 곳은 미 8군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이태원 입구의 클럽 'NX-1'이었다.1967년 어느 날 낮 거기서 연습을 하던 중 훤칠한 장신의 박인수가 자기를 한 번 테스트 해 달라며 찾아 왔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소울(soul) 음악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금방 돌아 오는데, 자신감이 느껴졌다. 테스트를 해 보았다. 템프테이션즈의 'My Girl'과 오티스 레딩의 'Dock Of The Bay' 같은 곡은, 한 번 불렀다 하면 그야말로 흑인이 울고 갈 정도였다. 거기에다 플래터스, 샘 쿡, 레이 찰스 등 흑인 가수의 노래라면 못 하는 게 없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그 클럽은 원래가 백인 클럽이어서 흑인들은 정 원한다면 문간에 서서 음악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흑인 한 명이 문간에 붙어 음악을 훔쳐 듣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자가 노래를 듣다 말고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 아닌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우르르 몰려 온 흑인 친구들은 박인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게다가 박인수가 흑인 특유의 은어(slang)를 몇 마디 구사하자 그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거기는 백인 클럽. 노래를 끝내자 마자 지배인이 오더니 당장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의 위선을 절감했다.

나는 박인수를 연세대 앞의 내 사무실 '언더 그라운드 파라다이스'로 데려갔다. '봄비'만 갖고 1주일 내내 연습시킨 뒤, '펄'과 김추자의 히트곡을 섞어 음반을 한 장 냈다. 뒤이어 시민회관에서 가진 무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봄비' 후렴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아 올린 절창에 공연장이 떠나갔다. 국내 최초의 소울 무대였다. 아마 어릴 적 기지촌에서 자라 그 곳 무대에서 봐 둔 듯 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박인수 하면 '봄비'다.

미 8군이 철수하고 난 뒤에도 박인수를 주변에 있던 비공식 무대에 데리고 나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졌던 6개월간의 무대였는데, 흑인들은 그의 언행 하나 하나에 죽고 살았다. 요즘 흑인들이 여대생들한테 인기가 있다던데, 당시 '흑인보다 더 한 흑인의 영혼'을 지닌 박인수에게 쏟아졌던 열광은 아마 지금보다 더 했을 거라 믿는다. 그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는 여성 팬들에게 납치되는 일마저 종종 있었으니,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여자들을 실제로 보고 많이 놀랐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에게 너무 인기가 너무 많다 보니 사생활이 흐트러진 점이다. 하기사 박인수의 삶이란 게 '브레이크가 없는' 것이었다. 박인수가 속해 있던 그룹 '퀘션스'가 해체된 것 역시 스타로 부상하고 난 박인수가 활동을 소홀히 했던 탓이 크다. 나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활동 금지된 그는 두 차례의 결혼 실패 후 여지 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박인수는 태생적으로 슬픔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 입양된 후 귀국했으나,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정을 붙일 곳이 없었다. 미국에서 난데 없이 혈육이 찾아 왔다는 등 알 수 없는 소문만 뒤를 이었다. 1980년대 "몸이 아프다. 도와달라"며 종종 나를 찾더니 95년 후배 연예인들과 대마초로 구속되고 말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은 97년 후배들이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마련한 나의 헌정 공연 분장실이었다. 그는 말 없이 나의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잡더니 돌아 갔다. 그래도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까.

2002년 6월 후배들이 저혈당 등으로 고생하는 그를 위해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를 열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이미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명의 내 사단 멤버를 떠나보냈다. 나는 점점 더 '홀'의 상태로 접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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