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역사야 놀자'? 조폭, 섹스, 학교로 지평을 넓혀 온 코미디가 역사로 눈길을 돌렸다. 백제 패망의 마지막 고비인 황산벌 전투를 그린 '황산벌'의 이준익(오른쪽), 무과 급제 전의 청년 이순신을 만난 '천군'의 민준기(왼쪽) 감독은 관객에게 역사 뒤집기의 즐거움을 서로 주겠다고 야단이다.엄숙주의는 가라
민준기 처음엔 임진왜란 때의 일본인 장수 우키다 히데요키가 1990년 서울에 나타난다는 얘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비슷한 설정의 프랑스 영화 '비지터'가 나와서 접어야 했습니다. 6년 전 '조선대장부 이순신'이란 책을 읽었는데 덮는 순간 감동이 찡하고 오더군요. 이순신 장군은 군사 정권의 입맛에 맞게 미화된 점이 많습니다. 장원급제를 한 것도 아니고 활을 잘 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무과 합격 연령이 19세였는데 32세에 턱걸이했죠.
이준익 시대물을 하는 이유는 현재를 반영하기 위한 거죠. 국제 정세와 현대 정치, 그리고 지역감정, 또 역사적 위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나리오에 녹아 있습니다. 1998년 조철현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황산벌에 갔습니다. 백제가 패망하는 날 마지막 상황이 어땠을까 궁금했어요. 그 상황을 현대화하면서 코믹한 사투리를 넣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엄숙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보자는 뜻이죠.
영웅 뒤집어 보기
민준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은 이순신에 관한 얘기예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나오는 노련하고 경험 많은 이순신이 아니라 무과 급제 전의 서툴고 미숙한 젊은이가 '천군'의 이순신입니다. 우국충정도 뚜렷하지 않고 건달에 가깝죠.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젊은 이순신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 아닌가요?
이준익 계백 연개소문 김춘추 김유신 등도 마찬가집니다. 역사 속 장군들에 대한 이미지란 대개 군사 정권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각색한 측면이 있어요. 지나치게 애국심의 화신으로 미화한 것 아닌가요. 권위나 패권 다툼이나 신분 이런 걸 다 허물어버릴 거예요. 관념화한 인물을 풍자함으로써 쾌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복자의 논리로 각색되는 게 역사의 본질이겠지만 역사를 한 번 다른 각도로 들춰보자는 거지요.
민준기 계백도 이순신도 이제 21세기 버전이 나오는 거겠죠. 지금껏 장군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TV 사극에서 본 것뿐이잖아요. 실제 가까이서 장군들을 만나 보면 그렇게 엄숙하지만 은 않을 겁니다. 한 꺼풀 벗기면 똑 같은 사람이죠.
이렇게 웃긴다
이준익 대화의 묘미지요. 캐릭터의 독창성을 사투리를 통해 두드러지게 표현할 생각입니다. 사투리 속에 풍자적 요소를 집어 넣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상품 요소인 웃음을 끌어낼까 해요. (대본 속의 각국 수뇌회담을 엿들어 본다. 당고종이 '천하에 나라는 이 황제의 나라 하나 뿐'이라 하자 연개소문은 '니들 몇 년 돼서? 50년도 아니되지 않았슴메'라고 놀리고 의자왕은 '그라제, 말을 그란 식으로 거시기해불믄 안되제'라고 맞장구친다. 김춘추가 '황제께선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말씀하고 있다'고 당나라 편을 들자 의자왕은 '나는 정통성 쪼깨 있는디'라고 의뭉스레 받아 친다.)
민준기 남북한 병사들이 400년 전의 무기를 보는 관점, 이순신이 현대 무기를 보는 관점이지요. 이순신이 핸드폰을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식입니다. 이웃집 젊은이 같은 배우들을 써서 군인에 대한 고정관념도 허물 겁니다. 겉은 '각'을 잡고 있지만 한 꺼풀 벗기면 역시 똑 같은 인간이에요. 남북한 병사들이 이순신과 어울리며 빚는 에피소드도 있구요. 무엇보다 이순신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얼굴이잖아요. 얼마 전 현충사에 또 다녀왔는데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수십 대의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걸 보고 안심했어요. 남녀노소가 함께 웃을 수 있을 겁니다.
불온한 상상력?
이준익 문화선진국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제는 스스로의 역사를 풍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비지터'나 '아스테릭스' 등 고정관념을 통렬히 풍자하는 작품이 나와야 할 때예요.
민준기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죠. 현직 대통령도 풍자의 대상인데 영화는 오히려 늦었어요. 군사정권 때 만들려고 했다면 바로 남산에 끌려갔겠지만….
이준익 1,300년 전 황산벌이 그들에게는 전쟁터였지만 지금 나한테는 놀이터예요. 계백 관창 김유신은 놀이터의 미끄럼틀이나 그네이고요. 절대 위인을 폄하하자는 의도는 아닙니다. 위인을 깎아 내린다고 비난한다면 그건 졸렬한 사고입니다.
민준기 다 보시고 나면 영화를 만든 진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걱정 안 해요.
/이종도기자 ecri@hk.co.kr 사진=원유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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