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1년 뒤인 1970년 '님은 먼 곳에'가 대박을 터뜨리자 김추자는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만큼 바빠졌다. 정부는 '저속한 창법, 퇴폐와 폭력적'이라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고, 세간에서는 '거짓말이야'를 부르며 내젓는 손동작이 북한 고정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그녀는 두성(頭聲)과 비음 (鼻音)등 전통 창법이 금기시하는 테크닉을 적극 구사했고, 그 결과 그녀는 인기 최고의 반(反)트로트 가수가 된 셈이다.김추자는 나의 1대 1 트레이닝을 가장 잘 소화해 낸 가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기타를 치며 한 소절, 한 단어까지 어떤 감각이어야 하는 지 훈련시켰다. 테이프에 담아 집에서 연습을 하게 했다.
또 비브라토, 터치, 숨쉬기 등 노래의 테크닉이 마음에 들 때까지 나는 몇 시간이고 반복 연습을 시켰다. 그 같은 스파르타식 방법에 토를 다는 가수는 사실 아무도 없었지만, 김추자는 무조건 철저하게 따라 했다. 아니, 한 두곡 하고 나면 감을 잡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데 빨랐다.
'님은 먼 곳에' 히트 후 어느 날 갑자기 김추자와 연락이 끊겼다. 7개월쯤 뒤인가, 내가 출연하던 명동의 한 살롱으로 그녀가 한 남자와 함께 홀연히 나타났다. 음악 관계로 만나는 사람 같았다. 음식을 시켜놓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그 쪽에서 내게 "곡을 써 달라"고 강압조로 말했다. 안 그래도 일언반구도 없이 떠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남자가 테이블에 있던 스테이크 나이프를 집어 위협조로 나왔다.
그 당시 난 매일 담배 2갑, 짬뽕술, 밥 한 공기로 버티고 있었다. 그야말로 '깡'으로 버틴 시절이었다. 누구에게도 '야코'(기)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찍어봐라!"
나는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며 악을 썼다. 상대는 거구에다 레슬링 선수 김일처럼 귀가 다 닳은 험상궂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살롱의 손님은 물론, 밴드 단원들 역시 숨소리조차 못 내고 그 광경을 지켜 볼뿐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자는 부르르 떨더니 들었던 칼을 내동댕이 쳤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분통이 터져 못 견디겠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한술 더 떴다. 웨이터한테 더 크게 소리쳤다. "야, 주방 가서 사시미(회) 칼 갖고 와! 니가 못 찌르면 내가 찌른다!"
시퍼런 서슬에 그 덩치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잘못 했다"고 비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김추자는 벌벌 떨기만 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남자다운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좋다, 와라."
그렇게 해서 나는 야간 업소 출연 중에도 김추자에게 작품을 써주었다. 훗날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했던 '거짓말이야'를 비롯해 '소문 났네'등 일련의 김추자표 히트곡들이 그때 나왔다. 나도 시민회관, 대한극장 등에서 '김추자 리사이틀'이 있으면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었다. 이미 나는 김추자의 대타로 사이키델릭 가수 김정미, '미련'의 오리지널 가수 임하영 등을 키워내느라 바빴다. 그러나 사정도 모르는 방송에서는 김추자와의 공동 출연을 자꾸만 요청해 왔다.
여고 3학년의 나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김정미를 가수로 키워낸 것은 김추자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봄비'의 가수 박인수도 잠적해 버려 김정미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제작자들은 상업성이 없다며 머리를 저었으나 나는 그녀에게 힘을 쏟았다. '간다고 하지 마오', '오솔길을 따라서', '바람' 등 모두 4장의 앨범이 그렇게 나왔다.
김추자를 다시 만난 것은 80년대 중반 디스코 붐이 불 때였다. 생활고를 해결하려 부산으로 지방 공연을 가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이제는 새로운 음악성 없이는 힘들다"며 "꼭 재기하고 싶다면 한 1년 연습해 보자"고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한 그녀는 여지껏 무소식이다. 아마 스타로서의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텐데, 나의 직선적 대인 관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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