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언론에서는 스핀(Spin)이란 말을 흔히 쓴다. 원래 물레로 실을 잣는 것을 뜻하지만, 물레처럼 빙빙 돌려 현혹시킨다는 의미로 이어져 사실을 왜곡·조작하는 거짓선전이나 언론보도를 지칭한다. 뜬금없이 스핀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선 이라크 전쟁과 북한 핵사태의 국제적 '위기'가 겹친 상황에서, 나라 안팎을 가림없이 왜곡과 거짓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와 북한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이를 견제·응징하는 명분을 정당화하는 논리들이 객관적 검증없이 전파되고있다.전쟁을 보는 미국과 유럽의 여론이 판이한 것도 양쪽 언론의 보도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른 탓이 크다. 뉴욕 타임스의 폴 크루그만은 미국 언론이 서유럽 언론에 비해 보수적이며, 전쟁 문제에서 호전적이라고 자평(自評)했다. 신문보다 방송 매체가 특히 문제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국 언론의 유별난 보수·호전성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른바 '보수적 아메리카니즘'(Conservative Americanism)의 반영이라고 할만하다. 학자들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악을 응징하는 대외 개입을 선한 미국의 소명(召命)으로 여기는 지독한 예외주의 신념을 그 바탕으로 본다.
미국의 대외 행동을 이끄는 이런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 국익 우선 행보를 합리화하려는 기만적 위선인지는 따질 계제가 아니다. 다만 미국 언론과 사회가 전쟁 명분에 편향된 데 비해, 서유럽 언론과 사회가 때로 정부 정책을 거슬러 반전을 외치는 근본은 살필 필요가 있다. 그게 북한 지원과 핵위기 등 이념이 개재된 문제에 대해 어느 때보다 분열되고 갈등하는 우리 사회와 언론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데 도움될 것이다.
영국에서 두드러지듯이, 유럽 언론과 사회가 정부에 맞서면서도 반전을 외치는 현상은 그만큼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사회세력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을 상징한다. 기성질서의 굴레없는 신대륙에서 민주제도를 발전시킨 미국이 좌우 이념의 치열한 다툼없이 보수 우파 지배체제에 이른 반면, 유럽은 역사적으로 오랜 갈등과 유혈 혁명까지 거치며 좌우가 나란히 경쟁하는 사회를 이뤘다. 미국이 일사불란하게 전쟁으로 나아가고, 유럽은 전쟁을 주도하지 않으면서도 소란스레 정당성을 논란하는 것은 그 단면이다.
미국과 유럽의 어느 쪽이 내부적 이념과 이익 갈등을 더 공정하고 무리없이 조정하는가는 구태여 논란할 필요가 없다. 미국이 늘 효율에서 앞서는 듯 하지만, 역사와 체제와 질서의 뿌리가 깊은 유럽이 사회적 연대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는 훨씬 우월하다. 우리를 되돌아보면, 북한 지원이나 핵위기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일찍이 경험하지 않은 '국론 분열'로 치달을 기세다. 3월1일 좌우 세력의 엇갈린 시위 구호가 마주 메아리 친 사태는 이념 갈등이 본격화할 전조(前兆)일 수 있다. DJ 정부와 지난 대선을 거치며 축적된 갈등 요인들이 언제까지 잠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갈등을 억누르거나, 한 쪽으로 몰고 가려는 충동은 경계해야 한다. 사회적 연대와 통합은 이념과 목적의 통합을 뜻하지 않는다.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요체다. 이런 맥락에서, 격동기를 맡은 새 정부가 이념과 사회세력의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 보수 언론의 폐해부터 고치겠다는 것은 오히려 걱정스럽다. 경쟁의 룰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할 일은 다른 분야의 정책부터 좌우 이념이 균형있게 실현되도록 애쓰는 것이다.
언론 발전의 모델 영국도 보수우익 언론이 우세한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대안은 개혁적 좌파 언론을 사회 세력이 지원하는 것이다. 그게 건전한 좌우 경쟁이다. 가판구독금지 따위를 앞세우는 발상은 또 다른 스핀, 언론조작이 되기 쉽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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