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기자생활을 시작한지 꼭 20년째다. 검찰 출입기자로 출발,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한 것으로 현장기자를 마감한 뒤 사회부장을 거쳐 이제 정치부장으로 있다. 그동안 독재정권의 틀을 깨고 민주적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충격적인 사건이 끝 없이 이어졌고, 그 대부분의 현장에 있으면서 기사를 놓고 정치권력과 씨름 하는 일은 어느덧 일상사가 되어왔다.특히 청와대와 국가정보원(과거 안전기획부)의 로비는 치열했고 또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가판신문이 나온 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 내용이나 제목을 고쳐달라며 전화가 걸려온다. 취재기자에게는 물론이고 데스크, 편집국장, 심지어는 경영진에까지 무차별적인 압력과 설득이 펼쳐졌다. 전두환 정부 시절이 가장 심했고 차츰 정도가 약해지기는 했으나 김대중 정부에 이르기까지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공무원으로 하여금 조간신문 가판의 구독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대한 뒷거래를 일절 못하게 한다고 했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성가셨던 일이었는데 청와대부터 그러지 않겠다니, 정말 두 손을 들어 반길 일이다. '정권과 언론의 유착관계'라는 표현에 대해 "별로 얻어먹은 것도 없는데 유착이라니…" 하는 억울함이 마음 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언론이 그동안 제 할 일을 제대로 다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냥 삭이기로 했다.
소주파티만 해도 그렇다. 술 먹고 골프 치는 것도 친구와 하는 게 좋지, 취재원과 같이 하는 것은 싫었다. 기분 좋자고 하는 일인데 취재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정치인이나 공무원과의 자리는 거북하기만 했다. 우리 사회가 '밤 문화'를 통해 상당부분의 일이 이루어지는 게 관행이니, 술자리에 초대를 받으면 행여 중요한 기사가 나올까 해서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기자 하면 술'이라 할 정도였으니, 남편이 술 마시는 것을 반기지 않는 아내도 노 대통령의 '소주파티 금지령'을 크게 환영했다.
"권력과 언론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맞다. 하지만 권력이나 언론이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실제로 노 대통령이 당선자의 신분이었을 때 지금 총리가 된 분도 전화를 걸어와 가판에 난 기사의 제목을 바꿔달라고 했었고 비서실장을 했던 분은 "기사가 틀렸다"며 거짓말을 해 결국 가판에 난 기사를 빼도록 한 일이 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고 모두 노 대통령의 측근이 한 일이다. 언론도 정확한 기사를 쓰도록 만전의 노력을 해야 하지만, 노 대통령도 바로 주변부터 언론사에 전화를 하지 못하도록 정말 철저히 단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일이 더 있다. 언론사에 출입하는 정보기관원을 철수시켜야 한다. 한국일보 주위에는 종로경찰서의 정보과 형사와 국정원 요원이 맴돌고 있고 기무사쪽에서는 아주 가끔 전화만 걸려온다. 말로는 '정상적인 정보업무'라고 하지만 그들이 갖는 관심사를 보면 무슨 일을 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기사에 관련한 정보는 물론이고 회사 경영상황, 주요 간부들의 신상이나 성향 등을 캐묻고 다닌다. 바로 어제 저녁에도 '한국일보 담당'이 버젓이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렇듯 권력기관이 언론사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판에 '정권과 언론의 정상적 관계'를 말하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노 대통령은 "한두 달 안에 바로 잡겠다"고 했지만 오늘 당장이라도 했으면 싶다. 하여간 나는 오늘부터 가판이 나온 뒤 전화를 받지 않을 작정이다.
신 재 민 정치부장 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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