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성기는 참으로 화려했다. 대관절 어느 정도였길래 감히 이렇게 말하는지, 그 시절 풍경을 전하고 싶다. '신중현 사단'은 1970∼74년 무대에 오르는 멤버를 비롯해 업무를 처리하는 사원, 보디 가드 7∼8명까지 많을 때는 70∼80명에 이르렀다.그것도 내가 모으거나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지원한 자들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자원 봉사자인 셈. 대개가 운동으로 잘 단련된 '어깨'들이었는데, 요즘처럼 문신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때 내가 한 번 움직였다 하면 청와대가 부러울 게 없었다.
어쩌다 지방 공연이라도 가면 그 지역 '어깨'들이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또 공연이 끝나면 나를 요정으로 모셔가 한 상 가득 저녁을 대접했다. 내가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자기네들이 먼저 알아서 '보스'들을 소개했다.
당시 '어깨'들은 딱히 내게 원하는 게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중현이란 존재 자체가 그들의 명성을 높이고, 자기네들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제격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홍보 차원에서 나를 주목한 것이다. 그들은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셨고, 내가 곡을 쓰거나 연습이라도 할라치면 주위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정말 숨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구경만 할 뿐이었다. 내 성격이 날카롭다는 사실까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명동 사무실에 와서 살다시피 한 그들은 밤만 되면 하루도 빠짐 없이 술 파티를 벌였다. 내 주위에는 덩치가 나보다 2∼3배 큰 자들이 항상 10∼20명 따라 붙었다. 술 마시러 갈 때 그들을 대동한 것은 내가 키우던 동생, 그러니까 가수들과 그런 자리에 가는 것을 피했던 연유가 크다. 당시 자주 찾았던 곳이 세운상가옆 풍전 호텔의 '풍전 나이트'였다.
나이트 클럽에서 춤추는 문화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조선호텔의 나이트 클럽은 값이 비싸 일반 대중이 쉬 접근하기 어려웠다면, 그곳은 대중적 가격으로 보통 사람들을 유혹했다. 말하자면 한국적 나이트 클럽의 효시였다. 그 곳은 밤마다 사람들로 미어 터졌다.
사실 거기서 나는 나의 히트곡이나 산타나의 음악을 연주했다. 'Black Magic Woman'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그룹 시카고 등도 인기가 있었으나 거기서 연주하지 않은 것은 춤추는 데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음악의 최대 소비처는 바로 그런 댄스 클럽이었다. 나는 '펄'이나 김추자 등의 히트곡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월남에서 돌아 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아니야' 등을 내가 부르면 춤꾼들은 무언가에 취한 듯 몸을 움직였다. 소문을 듣고 타워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거기도 내가 오픈 시켜 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호텔 나이트 클럽 설립의 도화선이 된 것 같다.
나이트 클럽이 문을 여는 시간은 대개 오후 7시∼다음날 새벽 4시였다. 새벽 4시는 통금이 해제되는 시각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대중 여흥 문화가 없던 시대에, '나이트 문화'라는 한국 특유의 관습을 배태하고 있었다. 정권은 우후죽순 양상으로 번져 가는 나이트 클럽 문화를 놀라서 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꼬박꼬박 세금 잘 내는데 뭐라 하겠는가. 나이트 클럽에 대한 규제가 시작된 것은 유신 이후였다.
나이트 클럽 연주 당시, 나는 하루에 맥주, 양주, 칵테일 등 다섯 종류의 술을 뱃속에 들이 부었다. 그렇게 많이 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스테이지가 끝나면 손님들은 경쟁적으로 자기 테이블로 불렀던 것이다. 나는 웨이터와의 안면도 있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테이블 순례가 끝나면 스탠드 바가 기다렸다. 진토닉, 만하탄 등 칵테일도 엄청나게 마셨다. 취한 상태에서도 연주는 계속했다.
'짬뽕 술'을 견딘 것을 보면 내가 술이 세긴 센 모양이다. 새벽이면 또 친구들과 장충동 등지의 해장국 집으로 몰려 가서 소주를 돌렸다. 음악 이야기, 개똥철학 등 별별 이야기가 다 도마에 올랐으나 단 한 가지, 정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생활은 겉보기에 파락호 일보 직전이었다. 밤을 꼬박 샌 뒤, 이르면 아침 6시에, 늦으면 8시에야 집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술로 지샌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