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짧다고 방심했다가는 큰일 날 수 있다’는 어느 홈쇼핑 광고. 딱내 얘기다 싶다. 고3, 초6인 두 아이가 한꺼번에 졸업을 맞게 된 것이다.무사히 한 단계의 학업을 끝냈다는 안도감을 음미하기도 전에 무슨 선물을해야 할까 걱정부터 앞섰다. 전기값도 아까워 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란 덕분인지 낭비라면 질색을 하면서도 풍요의 시대를 사는 아이들답게 뭘 안겨줘도 시큰둥이니까.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난생 처음 손목시계와 만년필을 갖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어서였다. 구일 세이코(구일은 아마도 세이코와 합작한 한국회사이름인 듯) 시계가 내 손목위에서 째깍거리던 순간의 희열. 만년필은 빨간색 파이로트였다. 검푸른 잉크를 만년필 튜브에 쭉 빨아들여 영어공책에ABCD를 써보면서 “아, 내가 높은 공부를 하게 됐구나”며 대견했었다.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 받은 선물은 가죽으로 만든 학생화였다. 멋진 금강 구두를 신고다니는 옆학교 학생들이 중학 시절 내내 얼마나 부러웠는지. 만년필=중학생, 가죽구두=고등학생 같은, 물건과 연령대의 등식을 철썩같이 고수하던 엄마를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엄격하게 지켜진 ‘소유의 법칙’ 덕분에 작은 물건 하나에도 얼마나 감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요즘 아이들은 짐작이나 할까.
시계? 서랍만 열어봐도 서너개가 굴러다닌다. 가죽구두? 엄마가 중학 시절이것 때문에 꿈속에서까지 외할머니를 졸랐단 말이야?
아무리 궁리해도 우리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선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땐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것이 최고다. 스스로 돈을 관리하고 고민하며 물건을 구입해 보는 즐거움 자체를 선물하는 건 어떨까.
남편과 돈을 모아 두 아이 통장과 도장을 만들었다. “자, 이제 이걸로각자의 살림을 시작해 보는 거야”하며 건네주었더니 둘다 발갛게 흥분된얼굴로 기뻐했다. 어떤 선물일까, 두근거리며 포장지를 풀러보는 기쁨은없지만 이제 엄마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이 합리적 소비의 주체가 되어본다는 기대감이 적지않은 것 같았다.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10대, 20대 신용불량자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욕망과 능력을 조율하는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스무살 이제 돈과 친해질 나이’라는 책자를 들춰보니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우리 젊은이들이 금융 문맹자가 된 것은 가정과 학교 그 어느 곳에서도 돈에 대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남의돈 무섭고, 내 돈 귀하다는, 돈에 관한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이번선물은 성공일 것 같다.
이덕규·자유기고가 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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