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 신형, 나야!" 문이 쾅쾅 울리고 아닌 밤중에 난리가 났다. '펄'과 약속한대로 기념 음반을 만들어 주고 난 며칠 뒤 새벽이었다. 곤한 몸으로 잠에 빠져 있던 나는 부시시하게 일어나 쪽문을 따 줬다. 당시 나는 연세대 입구에 어설픈 신방을 차리고 있었다. 동거하고 있던 우리 부부 사이에는 돌이 갓 지난 대철이가 자고 있었다.숨이 턱에 차, 부엌을 통해 허겁지겁 들어 온 불청객은 다름 아닌 킹레코드 사장 킹 박이었다. "떴어!" 뭐가 떴냐고 물으니, '님아'가 든 판이 떴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가지 말고 2탄 만들어야지. 내가 책임진다니까."
'펄'의 음반은 당시로서는 혁명이었다. 배인숙, 인순 두 사람은 당대 여가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보컬로 전국을 휩쓸었다. 트로트 가수의 매끈한 소리에만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던 것이다. 자연스런 여파로 '펄'을 본뜬 여성 듀엣이 속출했다. '이 씨스터즈', '리리 씨스터즈', '아리랑 씨스터즈', '현경과 영애', '바니 걸스' 등.
'펄'에게 음반까지 내줬겠다, 이제는 베트남 갈 날만 기다리고 있던 터에 그 호들갑이 얼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이야기했던 대로 당시 나는 미군 무대에서 세계의 유행 음악을 꿰고 있었기에 국내에서 음반을 내거나 무대를 갖는 데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경기가 위축되고 무대도 줄어든 한국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는 등 만사가 싫어진 때였다. 그러나 미 8군 쇼 무대 에이전시인 '화양' 프로덕션에서 받은 베트남 무대 계약금까지 해결하겠다는 킹레코드측의 약속에 나는 베트남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국내 음악계에서 나만의 영역을 확보하기 시작한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김호식(드럼), 김민랑(키보드), 이태현(베이스), 오덕기(리듬 기타) 등과 함께 새 출발을 할 생각으로 5인조 그룹 '덩키스'를 만들었다. '당나귀'란 뜻의 이 이름은 나의 스승 이교숙이 8군 무대에서 화성학을 가르칠 때, 30여명의 학생들을 뭉뚱그려 부른 애칭이었다.
한국의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 무렵은 나에겐 음악적 재탄생기였다. 1964년 장미화를 '에드 훠'의 첫 음반 '빗속의 여인'을 통해 데뷔시키고 나서 75년 활동이 금지되기 직전까지의 11년이다. 특히 69년에서 74년까지 5년간은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곡을 썼다. 지금까지 발표한 300여곡의 작품 가운데 이 기간에 나온 작품이 190여곡이다. 그 절정기이던 71년, 매스컴에서 붙여 준 '신중현 사단'이란 애칭은 당시의 영광을 잘 압축해 준다. '펄',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더 맨'등이 명동 로얄호텔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70년도 전후에 유행했던 별칭이었다.
'신중현 사단'은 68년 '펄'의 '님아'와 이듬해 픽업한 김추자의 노래들로 본궤도에 올랐다. 불세출의 가수 김추자 등 내 '사단'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다. 여가수들과는 음악 이야기만 하고 항상 음악적으로 강도 높은 요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음악이 제대로 안 나오면 그런 사람과는 아예 대화조차 않았다. 음악 문제에서는 절대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겉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 모두 내게서 항상 어떤 거리를 느꼈을 것이다. 여가수들이란 감정이 예민해 내가 다른 여가수를 조금이라도 칭찬하는 듯하면 금세 삐치기 일쑤여서, 이 부분에 항상 신경을 썼다. 남자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사단' 중 남자 멤버였던 장현과 박인수까지도 내 작품을 놓고 서로 자신의 곡이라며 싸웠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됐다.
어려서 이미 세상의 쓴 맛을 다 알아 버린 나는 성격이 차다. 쇼 비즈니스에서 냉정함과 단호함을 구비하지 않으면 음반을 한 장도 낼 수 없다는 현실을 체득한 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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