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아웃(KO)'이란 6인조 패키지 쇼 단으로, 규모를 줄여서 클럽 무대를 돌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미군의 절반이 철수한 까닭에 무대에 오르는 횟수는 한 달에 20 차례도 안 됐다. 레퍼터리도 외국 팝에 국한해 대중적인 미국 팝이나 '비틀스' '크림' 등 영국 록 그룹의 곡을 불렀다. 비록 거기서 내 노래를 부르진 못했지만 당시 한국에서 가장 폭 넓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나름의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클럽 출연 시간은 1시간이었지만, 보통 3시간 이상 머물며 견문을 넓혔다.AFKN의 음악 방송을 밤새 들으며 새 유행곡을 한 곡이라도 놓칠세라 열을 올렸다. 덕택에 본토의 미국인조차 도너츠판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노래를 나는 한달 전에 접할 수 있었다. 1년 뒤에야 시내 음악 감상실이 그 곡을 LP로 들려주었다.
거기는 미 8군을 제외한다면 새 팝송을 쉽게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서울에는 '은하수', '세시봉', '돌체', '아카데미' 등 100여평 넓이의 음악감상실 4곳이 유명 DJ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프랭크 시내트라, 팻 분, 폴 앙카 등의 신곡이 제일 먼저 소개되던 그곳은, 말하자면 느슨한 의미에서 마니아들을 양산해 내던 곳이었다.
미군이 전장인 베트남으로 슬슬 빠져 나가자 경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게다가 '넉 아웃'의 보컬 이정화가 67년에 발표했던 '봄비'와 '꽃잎' 등 6곡에 대한 반응이 영 시큰둥해 축 처져 있었다. 지금이야 '봄비'는 나의 대표곡으로 자리를 잡았고 '꽃잎'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같은 이름의 96년 영화에서 주제곡으로 쓰였지만, 그때만 해도 둘 다 너무 시대를 앞서갔던 탓인지 모른다.
베트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이듬해 봄, 나에게도 전기가 찾아 왔다. '펄 시스터즈(배인순, 인숙)'가 '넉 아웃'의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미 8군 무대에 서고 싶었던 '펄'은 원래 유니버살 소속이었다. '펄'은 그러나 일반 패키지 쇼단에서 늘 하던 형식이 아닌, 새 시대의 록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국서도 막 뜨던 사이키델릭 록의 표상인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가 '펄'의 목표였다. 문제는 자신들이 그 곡을 부를 수 있게 만들어 줄 편곡자였다.
나는 수려한 외모가 받쳐 주는 그들의 노래를 듣고 성공을 직감했다. 일이 끝난 새벽 1시에야 시간이 났는데, 나는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해 마장동 유니버살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시켰다. 사이키델릭 록을 한국적 가요와 접목시킨 '커피 한 잔', '님아', '떠나야 할 그 사람' 등 일련의 명곡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님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노래였다. 절규하는 창법, 후렴, 보사노바와 록을 결합한 선율, 8명의 현악 주자를 불러 넣은 클래식한 반주 등은 타성에 찌든 한국 가요계를 뒤집었다. 어느날 세운상가에 나간 김에 음반 소매상엘 들러보니 2∼3분에 한 명 꼴로 사람이 들어 와 찾는 판이 '님아'였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펄'은 69년 12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MBC 개국 8주년 기념 행사에서 가요왕으로 뽑히더니 포켓판 노래책 '대중가요' 등에서 잇따라 인기가요 1위를 차지했다. 외국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한국적 가요로 만든 것은 '펄'이 최초다.
그러나 미 8군쪽 경기가 너무 침체돼 있던 때라, 내 머릿속엔 베트남에 갈 생각 밖에 없었다. 국내의 미군 상대 에이전시들도 이미 짐을 꾸려 베트남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마침 '화양'측에서 베트남행 제의가 들어 왔다. 돈을 많이 준다는 말과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실은 베트남으로 갔다가 기회를 봐 유럽 같은 데로 뜰 작정이었다.
'펄'한테 내 심정을 이야기했더니 너무 아쉬워 하면서 기념 음반이라도 한 장 내달라고 거의 애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떠나야 할 그 사람', '님아', '커피 한 잔' 등을 리메이크해 킹레코드에서 출반할 생각이었다. 마침 사장 킹박이 나를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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