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하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천국이었다. 비록 3,000원이라는 빠듯한 월급에 악기 창고서 새우잠을 자야 했지만, 미 8군에서 난생 처음 내 마음대로 음악을 할 수 있었다. 미군들은 특히나 기타를 좋아했다. 졸병(PFC)들은 내 기타 솔로를 듣고 싶어 목을 맸다."헤이 스코시, 기타 솔로!"
그들은 놀림 반, 귀여움 반으로 내가 나타나면 환성을 질렀다. '스코시'란 일본어로 '작다'는 뜻이다. 일본서 근무하다 온 사병들이었던 것이다. 나도 팬 서비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니저한테 부탁해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타 솔로 곡을 담은 도너츠판 몇 장을 얻은 뒤, '야전'(야외 전축)에 걸어 두고 밤새도록 따라 했다. 그래서 뗀 곡이 당시 인기 최고의 '기타 부기 셔플'이었다.
다음 날 저녁, 용산고 옆 고급 클럽인 '시베리안 클럽'에 찾아가 연습도 않고 무대에 올랐다. 정신 없이 코드를 잡고는 내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 때 한 선배가 나를 툭툭 치며 '빨리 일어나라'고 성화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미국인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시베리안 클럽의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주변의 매니지먼트사들이 경쟁적으로 내게 줄을 댔다. 낌새를 챈 단장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월 1만 4,000원을 주겠다고 했다. 파격적이었다. 하루 아침에 월급이 무려 다섯 배나 오른 것이다. 당시 밴드 마스터 중간급의 보수가 2만 5,000원이었다. 그렇게 나는 창고지기 생활 6개월과 작별하고 원효로 입구에 있는 하숙방에서 뜨뜻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자는 시간에도 '판'을 돌렸다. 곤히 자다 아침에 깨어 보면 아직도 돌고 있는 야전이 지직댔다. 그렇게 듣던 음악이 주로 재즈였다.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 레이 브라운, 바니 케슬 등은 나의 영웅이었다. 미군들이 재즈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재즈가 미국 음악의 기본이라는 믿음에서 나는 듣고 또 들었다. 아마 미쳐있었던가 보다.
"Can you have a jam session with me?"
클럽에서 혼자 연주하고 있는 뮤지션들을 보면 나는 다가가 그렇게 물었다. 모두들 쾌히 응했다. 사전 아무런 약속이 없는, 그야말로 즉흥이었다. 당시 일반 대중은 물론, 음악깨나 하는 사람들도 흑인들의 블루스가 뭔지 몰랐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흑인 재즈 특유의 즉흥에 매료돼 그후 10년은 거기에 미쳐 있었다. 백인 재즈도 들었지만, 인위적이고 기계적이어서 금방 싫증 났다. 재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체득한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서두에 말했던 '진짜 음악(real music)'이다.
당시 대중에게는 '비 나리는 호남선', '신라의 달밤' 같은 노래뿐이었다. 동창들과 만나면 기타 반주는 쳐 줬지만, 절대 부르지는 않았다. 그 때 큰 인기를 끌었던 명국환의 '방랑 시인 김삿갓'이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노래여서 씁쓸했던 기억도 있다. 재즈에 미쳐 있을 때는 길을 가다 트로트가 나오면 귀를 막고 가기도 했다. 행여 귀를 버릴까봐.
나는 요즘도 트로트라고는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 것이라 배척한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말기 바란다.
흔히들 트로트의 원류라고만 알기 십상인 일본의 '엔카(戀歌)'는 실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노래다. 일본인 특유의 내면성이 받쳐 주는 섬세한 노래다. 이난영, 고복수 등 초창기 트로트 가수에겐 존경할만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겉만 흉내를 내다 보니 공격적 잡음이 돼 버린 것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식민 시대에 제멋대로 변형되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다른 풍으로 변했던 것이다. 상업성이란 건 그렇게 무섭다.
젓가락 장단의 노래(트로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약 10년 전 술을 끊었다. 술김에 얼마나 많은 말 실수를 했던가. 그러나 기분 좋은 사람하고는 술을 거두지 말자는 생각이다. 미 8군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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