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는 눈이 계속 내렸다. 그러나 눈 속에 묻힌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봄볕을 받으며 몸을 푼 물줄기가 더욱 명랑한 소리를 낸다. 특히 올 봄에는 산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그 물줄기가 더욱 장할 것이다. 얼음과 눈과 물이 공존하는 초봄의 계곡으로 가자. 계절의 변화가 실감난다.양양 미천골
사시사철 아름다운 골짜기다. 봄에는 신록이, 여름에는 녹음이, 그리고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골짜기를 덮는다. 겨울에는 흰 눈. 거의 환상적이다.
'아름다운 계곡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쌀물(米川)'이다. 계곡 초입에 선림원이라는 절이 있었다. 신라 법흥왕 때 문을 열었다가 고려말에 폐사됐지만 워낙 깊은 산중이어서 수도하기에 그만이었다. 그래서 불도를 깨우치려는 사람이 많았다.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계곡의 물이 온통 하얗게 됐다. 그래서 미천골이다.
미천골은 트레킹으로 안성맞춤이다. 입구에서부터 약 8㎞ 구간으로 불바라기약수까지다. 계속 걸으면 응복산, 산을 넘어 반대편으로 가면 양양 남대천의 최상류인 법수치리가 나온다. 물길을 따라 임도가 나 있다. 가파른 언덕은 없고 거의 평지다. 작은 다리로 계곡의 이쪽 저쪽을 오가며 길을 걷는다. 아직 눈이 쌓인 길은 등산화에 아이젠을 장착하고 걸어야 한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 저편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유난히 크고 작은 폭포가 많은 계곡이다.
미천골에는 명물이 많다. 가장 오래된 것은 선림원터. 계곡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축대가 나온다. 축대를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너른 벌판.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몇 개의 유물이 남아있다. 석등, 3층 석탑, 홍각선사탑비, 부도 등이 간격을 두고 벌판에 서있다. 모두 국보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들이다. 1,000년의 세월이 넘도록 벌판을 지키고 있는 돌조각. 세월을 느낄 수 있다.
두번째는 불바라기산장(033-673-4589)이다. 입구에서 약 2㎞ 정도에 위치해 있다. 숙박시설과 카페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펜션이다. 단골손님이 많아 주말이면 방을 잡기가 어렵다. 잠을 자지는 못하더라도 미천골을 트레킹하면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 골짜기 초입부터 4㎞ 구간에 걸쳐 자연휴양림(033-673-1806) 시설이 마련돼 있다. 구룡령을 넘는 56번 국도변에 있다.
평창 월정사 계곡
봄의 정취와 불교의 향기에 함께 젖을 수 있는 계곡이다. 오대산국립공원의 얼굴이기도 하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의 8㎞구간이 계곡의 진수이다.
월정사(033-332-6664)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절.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며 60개의 절과 8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절 안에 8각9층탑, 석조보살좌상 등 문화재가 많다. 월정사 계곡은 1㎞에 달하는 전나무숲길로 시작된다.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다. 왕복 2차선 넓이의 비포장도로이다. 땅이 마르면 차가 다니면서 먼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조금 피곤하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지금이 트레킹의 적기이다. 길은 가파르지 않다. 중간부분에 오대산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산장이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8㎞ 구간을 걸으면 상원사. 이제는 본찰인 월정사보다 더 유명해진 절이다. 원래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보필하기 위한 법당이었다. 청량선원이라는 수행방이 있다. 많은 불자들이 수행을 한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상원사에서 발길을 돌린다. 다리품을 약 1시간만 더 팔면 적멸보궁에 오를 수 있다. 오대산 중턱에 덩그라니 놓여진 적멸보궁은 호사스러운 절집이 아니다. 10명만 들어가도 꽉 찰 만큼 작다. 그러나 기세가 출중하다. 특히 풍수지리학적으로 으뜸이라고 평가받는다. '한국의 승려들이 오대산 적멸보궁 덕에 밥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영동고속도로 진부IC에서 나와 6번 국도를 타고 주문진쪽으로 가면 월정사 입구가 나온다.
강릉 단경골
강릉은 강원도에서도 관광 1번지이다. 대관령, 경포대 등 아름다운 곳이 많다. 단경골은 강릉의 숨은 진주이다. 주변의 유명세에 가려 아는 이가 드물지만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기암,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 강릉행을 결정했다면 반나절의 시간만 더 내면 된다. 계곡을 따라 약 6㎞ 정도의 비포장 도로가 나 있어 가족과 함께 트레킹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왕복 5시간 정도면 된다. 지난해 수해에 많이 망가진 것이 안타깝다.
단경골은 강릉 시내와 해돋이로 유명한 정동진 사이에 있다. 동해고속도로에서 정동진으로 연결되는 안인행 진입로로 들어간다. 곧바로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 약 500m를 달리면 왼쪽으로 영동공원묘원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단경골이라 쓰여진 입석이 보인다. 여기가 입구이다.
단경골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인 만덕봉의 골짜기이다. 인근의 산세가 사람이 오르내리기 힘든 악산인데 비해 이 골짜기만 완만한 경사이다. 큰 사찰이나 사찰터가 있을 듯한데 찾아볼 수 없다. 사연이 내려온다.
신라의 고승 도선국사가 이 골짜기에 들어 신라를 대표하는 큰 절을 지으려 했다. 삐죽삐죽 솟은 기암 등 남성적인 양기가 충만했다. 그런데 높이 오르면서 점점 평평해지고 얌전해졌다. 골짜기의 전체 모습은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오히려 음기가 강했던 것이다. 도선은 여기서 승려들이 수행을 하다가는 몸을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음기가 강한 이 골짜기에 삽이나 천공기를 대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 1960∼70년대 인근 탄광에서 재미를 본 광산업자들이 이 곳에서 탄을 캐려 했다. 탄층이 나왔는데 포기할 양도 아니었지만 수지가 맞을 정도도 아니었다. 결국 업자들은 야금야금 자금을 빼앗기고 거지 신세가 되어 산에서 내려왔다.
현재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곳은 7부 능선인 담정농원(033-645-7006)까지이다. 1996년부터 무기한 자연 휴식년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직 계곡에는 겨울빛이 짙다. 그러나 등성이의 눈 녹은 물이 계곡을 점점 봄빛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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