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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패트롤] "3류서 명문으로" 담양 창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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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패트롤] "3류서 명문으로" 담양 창평고

입력
2003.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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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의 창평고(昌平高). 고입 연합고사에 떨어진 학생들이나 가던 '3류 학교'였다. 10여년 전쯤 광주·전남 지역에서 중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니 공부 안 하면 창평고 보낸다"던 담임 교사의 으름장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할 터. 구전되던 창평고 이미지는 60명중 60등짜리도 입학을 치욕으로 알았을 정도였다.괄목상대(刮目相對)가 이보다 더할까. 올해 창평고는 서울대 8명 등 졸업예정자 431명 전원이 4년제 대학에 합격했다. 100% 대학 합격의 역사는 올해로 3년째다. 농어촌특별전형도 217명이 합격해 8년째 전국 1위를 지키고 있다. 이쯤 되면 '명문고'라는 간판에 딴죽을 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는 걸까. 기자 역시 궁금했다.

"이젠 최고 명문이여"

20일 호남고속도로 창평IC를 빠져 나와 들어선 전남 담양군 창평면. 걸쭉한 남도 사투리로 왁자지껄한 장바닥을 끼고 돌자 '창평고등학교'였다. 대낮부터 불콰해진 현영기(65)씨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학교죠"라는 기자의 수상쩍은 질문에 "떼끼. 기자가 그것도 몰라. 창평고가 명문 중의 명문이여, 전교 10등 안에 못 들면 오지도 못 혀"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세상이 바뀐께 핵교도 많이 바뀌었지라"라며 김모(76·여)씨가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 처음 설 때만 해도 공부 못 하는 아그들 땜시 근처 공립 창평중 애들까지 물든다고 말도 못 했어라. 오죽하면 거시기(기숙사) 지어놓고 (애들이) 핵교에서 나오는 뱁이 없었응게." 아주머니 하나가 끼어 들었다. "근자엔 창평중 애들도 창평고 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 안 하요. 돼지 키우는 고서댁네 손녀도 창평고 간다고 그렇게 열심히 한다드만."

주민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들어선 학교 안도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날은 신입생들의 간단한 평가와 기숙사 배정이 있는 날이었다. 전남 각 시·군과 산간벽지, 도서에 퍼진 85개 중학교에서 올라온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대학에라도 붙은 양 행사 내내 싱글벙글이다.

"전남에서 내신이 15% 안에 들어야 오는 학교여라. 순천고나 장성고보다 한수 위란게. 인자 한시름 놓았소." 넷째 아들을 데리고 곡성에서 온 김천기(52)씨가 목에 힘을 줬다. 학부모들이 얘기하는 창평고 '명문' 부상의 이유는 주민들보다는 구체적이었다. "기숙사에서 3년 동안 책임지고 맡아주니까", "교사들 수준이 높데요", "공부만 하면 장학금도 많이 준다드만."

'인성이 돼야 공부도 한다'

교사들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고 했다. 1980년 개교 때부터 학교를 지킨 박형선 교장은 "첫해에 6학급 360명의 아이들을 모으려고 학교마다 찾아 다니고, 5차까지 모집하고, 플래카드까지 내걸었다"고 했다. 당시 고입 연합고사 커트라인을 넘긴 입학생은 거의 없었다. 광주 모 고교가 교복 색깔이 자기들과 비슷하니 바꾸라는 전화를 하기도 했단다.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1/2+1/3=2/5'라고 답하는 아이들 붙잡고 '산수'부터 가르쳤습니다. 조명희(46) 교사는 "공부하겠다고 자원한 20여명을 모아 당직실에서 먹고 자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전교생 70%(686명)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현재 창평고의 전통도 그때 만들어졌다.

'기숙사 생활'이라고 '스파르타식' 입시교육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창평고의 교육목표는 지금도 그렇지만 '인사 잘 하는 학생'과 '흡연하지 않는 학생' 등 인성 교육이다. 창평고 교사들은 입시성적보다는 "아그들이 순하고 인사성이 밝다"는 자랑부터 앞세운다. 고병석 전 교장은 "공부 못하는 아그들에게 공부로 스트레스를 주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예절교육부터 시켰다"고 했다. 그는 "1년 지나 인성이 바로잡히고 기초가 탄탄해지자 애들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며 "학교와 재단은 그저 공부할 수 있는 여건만 마련해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첫 회 졸업생 294명 중 서울대 1명 등 57명이 대학에 갔다. 남들은 여전히 비웃었지만 당시 교사들은 "남몰래 울었고,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기숙사를 늘리고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인성이 돼야 공부도 한다'는 교훈은 금과옥조가 됐다.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인성교육부터 시킨다. 교사들이 유일하게 강요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독서다. 2만여 권의 장서와 1,000석 규모의 도서관(만덕관)은 책을 읽는 학생들로 늘 붐빈다. 전명국(18)군은 "광주에 있는 학교처럼 무작정 입시공부만 시키는 게 아니고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생활지도만 한다"고 전했다.

교사는 교장이 직접 교육 열의를 보고 선발했다. 고 전 교장이 재단 이사장의 조카를 임용에서 탈락시킨 일화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공채로 뽑힌 소신 있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일류대를 권하기 보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택하도록 독려한다. 김휘(46) 교사는 "올해 서울대에 많이 진학한 것은 의외"라며 "진학상담은 아이들의 의사가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창평고는 서서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입 진학 성적도 성적이지만 졸업생들의 예절 바른 태도는 학교를 달리 보게 했다. 광주의 한 대학교수가 "과 학생도 아닌데 꼬박꼬박 인사하는 학생들은 알고 보면 창평고 졸업생"이라고 말할 정도다. 고 전 교장은 "알음알음 입 소문이 퍼져 실력 좋은 아그들이 많이 와 줬고 덕분에 학교가 이젠 어엿한 명문고 소리를 듣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음만 통한다면 공부 별거 아니어라"

오후9시 기숙사 청운학숙에는 예비 고3 학생들이 저마다 자유롭게 공부에 몰두해 있다. 묵직한 참고서 대신 신문과 책을 읽는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띤다. 1명의 관리부장과 4명의 전담 사감이 함께 생활하지만 '감독'이라기보다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장희(18)양은 "기숙사 생활도 입시공부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생활태도를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창평고는 이제 명실상부한 '명문고'다. '소신 있는 교사, 잠재력 있는 학생, 쾌적한 교육환경'이란 판에 박힌 말 이전에 비결은 따로 있었다. 바로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유독 자주 읊조리던 "믿음"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믿음, 학부모와 교사 사이의 믿음, 학생과 학부모 사이의 믿음, 그 단순한 진리가 창평고의 진짜 성공 비결이었다. "공부 별거 아니어라, 마음이 통하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 안 하요"하던 한 주민의 말처럼.

/담양=글 고찬유기자jutdae@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예절과 믿음" 박형선교장 교육원칙

"인성을 바로 세우면 공부는 저절로 합디다."

다음달 1일자로 3대 창평고 교장에 취임하는 박형선(58) 교장이 현장에서 얻은 교육 철학이다. "동네 문제아들이 학교에 쳐들어와 우리 아그들더러 '공부 못하는 놈들'이라고 놀리고 괴롭혀서 울기도 여러 번 했어. 그래서 아그들 인성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여. 근데 예절이 잡히니까 아그들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데 무섭더라니까."

1972년 교편을 잡은 박 교장이 창평고와 인연을 맺은 것은 79년 학교법인 월강학원이 설립되면서부터.

그는 매일 학생들과 함께 오전6시 첫 스쿨버스를 타고 출근해 오후10시 마지막 스쿨버스를 타고 퇴근한다.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든디요, 아이들 맴(마음) 알라믄 같이 움직여야지라." 그는 "베푸는 것도 단계가 있다"고 했다. "무작정 규제만 하고 다그치면 반발이 생겨요. 조금씩 믿음이 쌓이면 어느 순간 아이들 스스로 공부합니다."

그는 창평고에 쏠리는 관심이 마냥 즐겁지 않다고 걱정이다. "서울대만 많이 간다고 명문고라 하면 잘못이여." 그래서 그는 "아이들 인사성이 밝다"는 주위 칭찬이 더 고맙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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