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바람"최영의란 분이 있다. 이런 식이다. 소 앞에 서면 말이야, 너 소냐? 나 최영의야! 그리고 소뿔을 탁 잡고…" 영화 '넘버3'에서 청부폭력배 송강호가 더듬거리는 말투로 조직원들에게 '무데뽀정신'을 강의하던 대목을 한국 영화 최고의 명대사로 꼽는 회사원 이모(33)씨.
웬만한 조폭 영화를 다 섭렵한 그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 보는 재미에 빠져 지난 몇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자칭 '야인족'이다. "요즘은 드라마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주먹' 논쟁에 참여해 멋모르고 떠드는 논객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는 게 최대의 낙"이란다.
교보문고 어린이만화 코너에서 김두한 만화만 골라 읽던 김모(8·상명초교1)군은 "드라마도 거의 다 봤다. 맨 주먹으로 나쁜 놈들을 다 쓰러뜨리는 장면이 멋지다"고 신이 나서 말했다.
곁에 있던 어머니 최모(34)씨는 "드라마나 만화에 폭력 장면이 많아 한동안 못 보게 했는데 야인시대 모르면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끼일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보여 준다"고 말했다.
'주먹'이 문화판을 휩쓸고 있다. 영화 '친구'의 대성공 이래 한국 영화산업 부흥의 일등공신이 된 '주먹'은 '긴또깡'(김두한의 일본어 발음)을 최고의 유행어로 만들며 안방극장까지 접수했다.
원초적 본능, 혹은 낭만
'주먹' 붐의 이면에는 대박 상품 우려먹기란 얄팍한 계산이 깔려있지만, 그걸 알고도 열광하는 관객이 있기에 그칠 줄 모른다. 관객을 사로잡는 '주먹'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걸까.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은 "억제된 원초적 본능의 대리 충족"이라고 설명한다. "영화 '원초적 본능'이 잘 그렸듯 인간은 공격성과 성욕을 안고 태어나며, 이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에너지가 쏠리게 돼 있다. 특히 경찰국가 성립 이후 개인적 폭력이 불법, 혹은 나쁜 것으로 규정되면서 폭력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커졌다.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야인시대' 이환경 작가의 설명은 더욱 명쾌하다. "싸움 장면이 빠지면 누가 보겠나. 폭력을 미화한다는 지적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재미를 위해 그런 비난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의 '주먹' 붐은 본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 하필 지금 '주먹'인가.
'야인시대' 열성 팬이라는 회사원 박모(36)씨는 "회사에서는 상사 눈치, 집에 와서는 마누라 눈치를 살펴야 하는 초라한 일상 속에서 시원스럽게 주먹 한방으로 세상을 발 아래에 두는 영웅들의 멋진 삶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쌓인 스트레스를 날린다"고 털어놓는다.
반면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과거지향적 남성 판타지의 극치'라고 꼬집는다. "'주먹'을 향한 남성들의 환호에는 돈, 학력, '빽' 따위로 수직적 관계가 굳어지기 이전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담겨있다. '주먹'은 가진 것 없는 남성들이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여기에 지금은 설 땅이 좁아진 의리, 즉 아는 사람끼리는 잘못도 눈감아 주는 한국인 특유의 '집단적 방어'에 대한 향수가 덧붙여져 '주먹=의리의 사나이'라는 신화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혼란한 사회상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김진세 원장은 "과거를 돌아보면 사회가 위태로울 때 폭력 문화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며 "경제난, 정치 혼란, 북핵 위기 등에 따른 극도의 불안과 불만이 폭력의 간접 체험으로 분출구를 찾은 결과가 아닐까"라고 진단했다.
'바람의 아들'(시라소니) '바람의 파이터'(최배달) '피와 꽃'(역도산) 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방학기씨의 분석은 그가 조폭과 구별해 엄격한 법도를 갖춘 진짜 '주먹'을 일컫는 '낭만파 주먹'이란 말만큼이나 낭만적이다. "주먹 열풍은 월드컵 축구대회 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민중 영웅' 찾기 열망과 무관하지 않다."
1960,70년대 일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재일동포 양원석의 삶을 그리는 신작을 준비중인 그는 "사랑 의리 등 인간의 오욕칠정이 다 녹아있는 '주먹'의 삶은 시대가 변해도 영원히 통하는 문화 코드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폭력은 폭력
'주먹'이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머물 때는 낭만이자 판타지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로 나오면 문제는 달라진다. TV의 폭력성이 아동 정서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가는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또 실존 인물을 그릴 경우 지나친 영웅화는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다. 폭력문화 조장과 역사 왜곡을 우려하는 시선에 '도덕군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현실에는 더한 폭력이 있지 않느냐"고 강변하는 데 그친다면 '주먹'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한국영화속의 "주먹"
한국 영화는 1960·70년대에 이른바 '다치마와리'(활극) 영화를 양산했다. 80년대 멜로물이 쏟아지면서 뜸해지는가 싶더니 1990년 본격 액션물 '장군의 아들'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관객을 끌어 모으며 액션 영화 붐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액션 영화는 철저히 액션의 비장미를 강조한 장르 관습에 충실했다. 주인공은 주로 협객으로, 조직에 소속됐어도 '황야의 무법자'처럼 외로운 스타일이었다.
2000년 전후 한국 영화는 비로소 주먹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영웅식 결투가 아닌 주먹질 싸움 그 자체를 오랜 시간 영상에 담았다. 감독은 두 번째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도 주먹질과 발길질로 구성된 순도 높은 액션 영상을 선보였다. 총이나 칼이 아닌 주먹질의 미학은 드디어 주먹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역추적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품행제로'는 고교 '짱'의 신화가 대부분 그를 선망하는 '똘마니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설한다.
'주먹=조폭'의 등식을 만들고 공중파 TV에까지 소나기식으로 '조폭 콘텐츠'가 등장하게 된 데는 영화 '친구'의 역할이 크다. '친구'에서 발굴된 정운택 이재용 등 조연이 TV에 모습을 나타내면서 주먹계는 안방 진입에 성공했다.
이후 '주먹'은 다양하게 변주돼 대중의 일상에 파고 들었다. 중매로 결혼한 아내가 알고 보니 조폭의 두목이고( '조폭 마누라'), 요즘엔 조폭도 최소한 고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니까 뒤늦게 향학열에 불타고('두사부일체'), 여성 택시 기사가 알고 보니 과거의 '한 주먹'이라는('피도 눈물도 없이') 식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주먹 세계를 줌인했다.
지난해까지 변주가 계속된 주먹 이야기는 올들어 주먹 계보를 추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람의 파이터'는 가수 비를 내세워 '극진 가라테' 창시자인 최배달(본명 최영의), '조선의 주먹'은 시라소니 이성순, '역도산'은 1세대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김두한의 "야인시대" 모바일로 즐긴다
주먹 열풍의 진원지는 영화지만 주역은 단연 SBS 드라마 '야인시대'다. 한때 시청률 50%를 웃돌아 '대한민국 국민은 야인시대를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각종 파생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인터넷 VOD 서비스 이용건수는 하루 평균 2만3,000건(이용료 1,150만원) 안팎. 김두한 관련서 출간도 봇물을 이뤘다. 특히 9종에 달하는 어린이 만화중 일부는 베스트셀러에까지 올랐다.
최대 수혜주는 게임 업계로 90년대 오락실에서 유행했던 '스트리트 파이터'류의 격투 게임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게임빌이 드라마 내용과 등장인물을 그대로 옮긴 모바일 게임 '야인시대'를 LG텔레콤(019)을 통해 재빨리 선보여 재미를 봤다. 지난해 10월 하루 최고 이용건수 4,030건을 기록했고 요즘도 하루 500건 안팎이 내려받기된다. 새 캐릭터와 격투 기술을 추가해 지난달 선보인 '야인시대2'는 SK텔레콤(011)을 통해서도 나가고 있다.
오픈타운은 김두한 유족과 초상권 계약을 맺고 KTF(016·018)를 통해 '김두한의 야인지왕'을 선보였다. 김두한 하야시 시라소니 김춘삼 등 4개의 캐릭터 중 하나를 골라 이용자들끼리 대결 할 수 있다. 조이맥스가 SBS프로덕션과 공동개발한 초·중학생용 패키지 게임 '야인시대'는 출시 한 달도 안 돼 1쇄 7,000장이 모두 팔렸다. 오프타운 관계자는 "자금과 기획력이 달리는 중소 게임업체로서는 인기 드라마나 영화 활용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면서 "게임판에서도 '주먹' 열풍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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