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버 불(44) AIG생명보험 사장의 유머는 대단했다. 기자와 처음 만나 악수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외국인 특유의 제스처를 섞어가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보험 드셨나요? 이왕 여기 온 김에 보험 하나 들고 가시죠. 제가 설명 하나는 잘 합니다."3평 남짓한 소박한 사무실, 격의 없는 소탈한 유머 덕분에 인터뷰는 시종 유쾌하게 진행됐다. "한국 월드컵축구 선수들은 마치 황소와도 같았다"며 자신의 이름 '불(Bull·황소)'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기자가 고객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보험상품 하나를 들고 싶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인 AIG가 지난해 7월 한국지사장에 그를 임명한 것도 이런 능력 때문인 듯 싶었다.
그는 영국 본토박이다. 소도시 플리머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험업계에 뛰어들었다. '머컨타일 제너럴'이라는 재보험사의 언더라이터(보험인수심사자) 자리였다. "회사도 괜찮아 보이고 분석적이고 꼼꼼한 업무 스타일이 내 성격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 후 영국 로이드 보험사의 차석 언더라이터를 거쳐 1996년부터 6년 동안 AIG 일본지사장을 역임했다.
"그럼 25년 동안 보험만 팔았냐"고 묻자 대뜸 "축구도 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학교 대표 선수로 활약했고 영국에 있을 때는 틈만 나면 영업직원들과 축구 경기를 했을 정도. "아홉 살짜리 막내 아들 알렉스가 용산의 외국인학교(SFS)에 다니는데, 제가 그 학교 주말 축구 코치입니다. 저와 한국인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축구 사랑일 겁니다. 월드컵 때 보여준 한국인의 열정에는 축구 종주국인 영국 사람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가 '축구의 나라' 한국에 오자마자 큰 일을 하나 터뜨렸다. 지난해 8월 태풍 루사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을 때 직원들에게 수재민 의연금을 모으자고 제안한 것이다. 한 직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영국신사로만 알았죠. 세심하고 꼼꼼하고 시니컬하고…. 그런데 직원 회의에서 갑자기 이러시는 거에요.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자. 당장 사내 펀드를 조성해 그들을 돕자'고요. 그래서 2,000만원을 전달할 수 있었죠."
트레버 사장은 보험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은 고객에게 신뢰를 파는 겁니다. 고객이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가 컨설팅을 해서 도와준다는 믿음을 파는 거죠. 그러면서 다양한 고객의 니즈(욕구)에 맞는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직원들과 회식 자리에서 늘 이 점을 강조한다. 한국 직원들이 따라주는 소주에 불고기를 먹으면서, 영업직 직원들과는 밤새 명동의 호프집을 누비면서 그는 "보험상품은 패스트푸드점의 세트메뉴"라고 강조했다. "고객들이 맥도널드의 다양한 세트 메뉴를 보면서 행복한 고민을 하듯이 보험상품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2월 출시한 'AIG 프라임 골드 연금보험'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 상품은 종신보험과 연금보험을 합친 형태입니다. 종신보험으로 상해나 사망에 대한 보장을 하고, 연금보험으로 노후설계를 하려는 고객들의 두 가지 욕구를 채워주는 상품이죠. 지난해 12월 내놓은 'AIG 무사통과 실버보험'은 효심이 강한 한국인의 특성에 맞춰 개발했습니다."
물론 한국에 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도 많다. 성북동 사택이 임대주택이라 자신의 또 다른 취미인 정원 가꾸기(그 중에서도 채소 심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매사에 너무 빨리 성과를 얻으려 한다는 것. 여기에 최근의 금리인하 상황도 큰 걱정거리다.
"생명보험은 가입 때 확정금리를 보장해주는 장기 상품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려면 고객들의 보험료로 안전한 장기투자를 해야 하는데, 한국에는 그런 투자처가 없어요. 시중 금리는 계속 떨어지고 국공채 만기(3년)는 너무 짧기 때문이죠. 이 고민은 AIG만이 아니라 한국에 들어온 모든 외국기업이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고민입니다."
끝으로 요즘 금융계의 화두로 떠오른 방카슈랑스에 대해. "방카슈랑스는 한마디로 은행과 보험사의 결혼입니다. 결혼해서 서로 같이 잘 살자는 것이죠. 윈―윈 게임이 돼야 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죠. 한쪽만 좋아한다고 해서 결혼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AIG도 행복한 결혼을 위해 신중하게 파트너를 결정할 계획입니다." /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 트레버 불 사장 누구
1959년 영국 플리머스 출생
1977년 영국 머컨타일 제너럴사 입사
1989년 영국 로이드 보험사의 차석 언더라이터
1991년 영국 루타인 보험사의 경영이사
1996년 미국 AIG 일본지사(ALICO) 사장
2002년 7월 AIG 한국지사(AIG생명보험) 사장 부임
영국인 아내와 2남 1녀. 큰 아들(19)과 딸(18)은 영국에, 아내와 막내아들(9)은 한국에 있음.
■ AIG는 어떤 회사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AIG는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미국 500대 기업 중 보험회사 부문 3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보험회사. 1919년 설립된 AIG는 동남아시아, 남미, 유럽, 일본 등지로 사업을 확장, 현재 130개국에 440여개 지사가 있다. 1967년 CEO로 부임한 모리스 그린버그는 한국전쟁에 참전, 동성무공훈장을 받는 등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87년 설립된 AIG생명보험 한국지사는 98년 세계적 신용평가 기관인 S& P로부터 국내 보험업계 최초로 최우수등급인 AAA를 획득했다. 서울에 치중하는 다른 외국 보험사와는 달리 지방 공략에 중점을 두는 것이 특징. 우편·텔레마케팅 등 통신판매기법과 생명·손해보험 겸업대리점(FSA) 제도 등 선진기법도 도입했다. 현재 국내 영업점은 38개, 보험설계사는 5,3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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