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21일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 당시 국민당을 지원했고 한국전쟁 때는 중국의 맞상대였던 미국의 최고지도자가 '적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 때까지 미국은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베이징(北京) 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래 금수 조치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찍이 예언했듯,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미국이었다. 1969년 초에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분쟁에 편승해 중국과 대화 채널을 만들고자 했다. 중국 역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소련과의 관계를 대등하게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정치적 수준의 접근 이전에 민간 차원의 준비운동이 필요했다. 1971년 4월10일 미국 탁구선수단이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정치적 접근을 위한 레일을 깔아놓았다. 이 사건을 저널리즘에서는 '핑퐁 외교'라고 불렀다. 꼭 두 달 뒤인 6월10일 닉슨은 대(對)중국 금수 조치를 해제했고, 그 다음달에 닉슨의 국가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실무 협상을 마무리했다.
닉슨은 이듬해 2월21일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 지도자들과 함께 상하이(上海)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나라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 대만과 중국 문제는 외부의 간섭 없이 중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대만은 중국의 한 부분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 공동성명의 골자다. 그러나 닉슨의 중국 방문이 즉각 두 나라의 수교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1978년 12월에야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듬해 1월1일 중국과 수교했다.
고 종 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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