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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공동 주최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南北 공동 학술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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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공동 주최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南北 공동 학술토론회

입력
2003.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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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한국일보 등의 주최로 열린 남북 공동 자료전시회 및 학술토론회는 사실상 광복 이후 최초의 남북 정례 학술 대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2001년 3월 '일제의 조선 강점 불법성'을 주제로 한 1차 대회에 이은 이번 토론회에 는 남측에서 강만길 상지대 총장을 추진 위원장으로 조동걸(국민대) 정창렬(한양대) 명예교수, 신균재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고문, 안병욱(카톨릭대)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등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 10여명이 참석했다. 북한에서는 허종호 조선역사학회장을 비롯,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와 김일성 종합대학 등 평양 주요 대학의 역사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토론회에서 남북 학자들은 일제의 강제연행과 관련한 연구 성과를 개괄하고 최신 발굴 자료 등을 소개하는 6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남측 발표 요지

▶강 만 길 상지대 총장

'일제 조선인 강제 동원의 역사적 성격'=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 시기 최소 600만∼700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됐다. 특히 1930년대 후반 강제 동원된 조선인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동원은 강제성과 폭력성이 특징이며, 기만에나 납치까지 자행한 종군 위안부 동원은 비인도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합법을 가장한 군사 침략으로 얻은 통치권에 따라 강행된 노동력 동원은 침략 행위의 연장이며 불법이므로 배상해야 마땅하다. 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은 보상 조약이 되지 못하고 '청구권 조약'에 그쳤다. 그 때문에 종군 위안부나 강제 동원 노동자에 대한 개인 배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체결될 북일 조약은 반드시 배상 조약이돼야 민족해방운동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다.

▶강 정 숙 한국정신대연구소장

'일제 말기 조선인 강제 동원의 비인도성'= 전시 노동력 동원령에 따라 일본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은 갱 안에서 하루 10∼12시간 혹사 당했고 임금도 일본인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돼 일했던 조선 여성에는 12, 13세의 어린이도 포함됐다. 일제 말 징병령에 따라 동원된 조선인 군인·군속 역시 노동 조건이나 월급에서 엄청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결국 40만명 가운데 20만여명이 숨지고 행방불명됐다.

일제의 비인도적 행위는 최대 20만명에 이르는 조선 여성이 관권력의 공식·비공식적 강제와 물리적 폭력, 인신매매 등으로 연행돼 종군 위안부가 된 데서 압축돼 나타난다. 강제동원에 따른 사망, 상해 피해와 임금·군사우편저금·보험금 등 개인 자산의 미지급, 각종 부당한 처우에 따른 위자료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과 북이 힘을 합해야 한다.

▶정 태 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일제의 조선인 강제 노무 동원과 임금 탈취'= 조선인 강제 동원은 일본 정부가 구체적 입안과 시행을 주도하면서 이를 집요하게 요청한 일본 기업에 제공한 최대의 지원이었다. 일본 기업은 이를 탄광 등의 노동력 부족에 십분 활용했다. 1939년 9월 초기 모집은 일본 기업주가 후생성의 허가를 얻어 기업 대리인을 통해 실시했지만, 그 후 도지사가 징용 영장을 교부하고 모집·인솔하고, 조선총독부가 사업주에 인계하는 징용 방식으로 전환했다. 조선인 노동자 모집의 경우 약속 임금은 일급 상한이 2엔50전인 경우가 많았으나 실제로는 그 10%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이마저 거의 지급하지 않고 각종 저금 명목으로 해당 기업 노무계가 관리했으며, 이들은 사실상 지급 의도가 없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의 책임 회피와 부정, 자료 은폐로 군인·군속은 물론 해당기업별 강제 노동, 미불 임금 실상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다.

■ 북측 발표 요지

▶허종호 조선역사학회장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발과 집단 학살은 조선민족 말살을 노린 반인류 적 국가 범죄'= 근대에 이르러 일제가 감행한 첫 해외 진출이 조선에 대한 침략이었으며 그 이후 감행한 전쟁은 모두 조선 인민에 대한 착취와 약탈에 기반한 침략 전쟁이었다.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은 민족 성원에 대해 광범위하게 무차별 감행한 반인륜적 국가 범죄였다. 강제연행자 수는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구 2,000만명의 32.3%에 이른다.

조선인 강제 징발과 집단 살해를 포함한 식민지 지배 정책은 일본 국가의 법으로 제정됐고, 국가 전략에 의해 강행되었으며, 사법기관에 의해 철저히 단속됐다. 따라서 그 행위는 국가적 범죄이며 궁극적으로 조선민족의 말살을 노린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국가 정책의 소산이다. 일본 당국은 먼저 자신들이 감행한 국가범죄를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할 의무를 져야 한다.

▶이천홍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사

'중일전쟁 후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발 규모에 대한 고찰' =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발은 1938년 2월 육군특별법지원명령이 발표되고 이에 따라 조선 청년 400명이 지원병 1기생으로 일본 군대에 징발된 것이 시작이다. 그 규모는 모두 840만명에 이른다.

종전까지 조선인 징병자는 36∼37만명으로 거론됐으나 이번에 새롭게 41만7,000명을 확인했다. 보충된 숫자는 당시 조선에서 실시한 조선 청년들에 대한 징병 검사 합격자 20만6,000명과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서 실시한 징병검사 합격자 1만3,000여명, 해군 지원병 3,000명과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연습병 1만3,000명 등 육해군 징병자 수를 합친 것이다.

또 징용과 관련, 일본 대장성 관리국이 펴낸 '전쟁과 조선통치' 등의 자료 통계를 보면 과거 최대 480만명에 그친 징용자가 609만명으로 늘어난다.

해외 징용은 종전에 158만 7,000여 명이었으나 새로 입수한 일본공안조사청(1940년) 비밀 자료에 나타난 1944∼45년 조선인 징용 사료를 포함하면 168만 6,589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군대위안부 20만명을 더했다.

▶공평성 조선일본군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원

'조선인 강제 징발자들에 대한 피해 보상은 회피할 수 없는 일본의 국가적 의무'= 일본의 보상이 국가적 의무인 것은 첫째 범죄적 조선인 강제징발행위가 일본 국가에 의해 계획·명령됐으며 국가의 직접적 통제 하에 자행된 국가적 범죄행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모집단속규칙(1918년 공포)과 국가총동원법(38년)에 기초한 국민징용령(39년) 조선직업소개령(40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41년) 등이다. 일제는 공장 취업시간 제한령 등으로 장시간 노예노동과 강압적 작업 조건, 중세기적 노예규율을 법제화했다. 일제는 또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지 관장 기구를 강제징발 집행의 1선에 내세웠고 헌병 경찰 등 폭력기구를 적극 개입시켰다. 국가에 의해 감행된 국가 범죄는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국제법상의 요구이자 관례이다. 51년 일본이 도장을 찍으면서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 14조에도 일본의 피해 배상 의무가 명시돼 있다.

■ 토론회장 이모저모

남북공동학술대회가 열린 평양 인민문화궁전은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련 전시회 또는 국가 정상급 인사가 참석하는 국제회의가 주로 열리는 곳이어서 이번 행사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여겨진다. 남북 관련 행사로는 총리급 회담 정도가 열렸을 뿐이다. 20일 전시 개막식에는 남쪽 역사학자 10여명과 주최사인 한국일보와 SBS 취재진, 주관사인 월간 '민족21' 관계자, 기업인 등 47명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역사학회 회원들과 사회과학원 연구원,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회원 등 200여명이 250석 규모의 원탁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전시회장에서 단연 눈길을 끈 것은 군대위안부 피해자 박영심(80) 할머니였다. 1941년 당시 19세에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윈난(雲南)성 일대의 위안소를 돈 박 할머니는 20세에 강제 추행으로 임신까지 했으며 당시 배가 부른 채로 다른 위안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몇 해 전 국내외에 공개된 바 있다.

박 할머니는 이날 행사장에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가리키며 "하루에 왜놈 20∼30명을 당해냈다"며 "개만도 못했고,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당시 강제로 임신중절을 했으며 미군에 포로가 되고서야 5년의 위안부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최근 공개된 미 문서보관소 기록에서도 이름이 확인됐다. 전시회장에는 또 강제연행됐던 진내범(79·경기 안성 출신), 민성득(74·강원 철원 출신) 할아버지가 나와 증언했다.

남측이 제공한 100여 점의 사진과 북측이 낸 100여 점의 사진, 일제의 징병 포스터, 일본 미국 중국의 관련 공문서 등이 회의장 3면에 가득 전시됐다. 1938∼45년 전체 강제연행자 840만 명이란 제목 아래 탄광 광산 철도공사장 조선소 비행장 등에 내몰린 조선인 징용자들의 모습, 종군 위안부가 끌려 다녔던 지역, 위안부 모집을 위한 일제의 선전물 등이 전시됐다. 남측 자료 수집을 맡았던 김광문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강제연행 생존자 등 몇 가지 북측 자료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고 밝혔다.

/평양=한기봉기자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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