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안 쓰면 죽을 사람이다.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까닭은 아마도 글을 썼기 때문이리라고 믿는다. 나는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글쓰기란 나에게는 삶 그 자체이다.
글쓰기란 나에게 숨쉬기 그 자체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 지내라면 답답하고 좀이 쑤셔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집을 나서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오히려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힐 때가 많으며,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 원하지 않는 얘기를 나누거나 원하지 않는 술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 그리고 조금이라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동안이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줄줄 흘러나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낭비되는 내 인생의 작은 덩어리들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 싶어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내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삶의 시간이 흘러간다는 생각에 이렇듯 불안해 하던 마음은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은 다음에야 평화롭게 가라앉는다. 아마도 그것은 동물적인 귀소(歸巢)의 기쁨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특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휴대전화도 없으며, 이메일도 하지 않으며,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공간에 혼자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그러니까 나는 천성이 글을 쓰며 살아야 할 사람이다.
나더러 왜 문학을 하느냐고 물으면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다. 작가는 물론 어떤 소명의식을 갖고 무엇인가 깊거나 높은 사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존재라고 부분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 정당화를 하기에 앞서서 나에게는 글쓰기가 우선적으로 (좀 불결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생리적 배설(카타르시스)과 같은 작용을 한다는 고백을 해야 되겠다.
문학 작품이란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다같이 하나의 배설 작용이다. 영화 또는 연극을 보거나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따르면 작중인물과의 동일시(同一視)를 통해 가슴에 맺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버리는 작용이 되겠다.
하지만 배설 작용은 일차적으로 쓰는 사람의 몫이요 특혜라고 믿는다. 글쓰기는 어차피 일종의 고백 행위요, 궁극적으로는 자아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벌써 자살했을 것"이라고 했던 솔 벨로우의 말처럼 작가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기능이 먼저이고, 읽는 사람은 공감을 통해 모방 배설을 하는 셈이다.
생리적으로 인간은 배설을 못하면 죽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그런 현상은 비슷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끊임없이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정리하고, 정화하고, 그래서 삶을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글쓰기가 살아가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 다음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미친 듯 그림을 그렸듯 대학에 들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쩌면 나의 환경이나 주어진 운명에 대한 저항과 고발의 욕구를 위해서, 단순한 정신적 배설을 위해서 글쓰기에 열중했던 듯 싶다.
사실 나는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글을 쓰지는 않았다. '세계 명작'을 닥치는 대로 읽어치운 다음 나도 무엇인가 쓰고 싶어서,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경험'을 배설하고 싶어서, 무작정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만일 작가가 되고 싶었다면 나는 단편소설을 만들어 신춘문예를 기웃거리거나, 기성 작가들을 찾아 다니거나, 남들이 하는 대로 무엇인가를 했겠지만 나는 그러지를 않고 처음부터 영어로 장편소설만 썼다. 그냥 쓰고 싶어서였다.
3학년 때 완성한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포함해 일곱 권의 소설을 써내는 사이에 나중에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글쓰기를 장래의 직업으로 뒤늦게 선택해 나름대로 혼자 창작 공부를 '정식'으로 거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숨을 쉬듯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을 안 쉬면 답답하듯이. 그때 이미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60 평생을 살아오면서 대학에 들어선 다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멈춘 '적'이 없었던 까닭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영어 장편소설을 외국 출판사에 한 권도 팔지 못해서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일단 무너졌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직업으로 갖게 된 기자 생활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존 스타인벡, 그리고 다른 여러 작가들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위한 훈련의 연장이라고 받아들이며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남다른 좋은 경험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에서 베트남으로 가서 '파월 장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생활은 진정한 글쓰기의 삶은 아니었고, 그래서 결국 20여 년 전에 나는 신문사를 떠나 집안에 들어앉는 생활을 시작했다. '번역문학가'로서의 생활도 무척 오래 했지만 150권에 달하는 '남의 작품'을 옮기는 일이 나름대로 버젓한 문학 행위이기는 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리 배설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인생을 계속 낭비한다는 허전함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소설쓰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흔히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고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궁금해 하거나 아쉬워하는 사람도 자주 눈에 띄지만, 나는 별로 그런 편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글쓰기의 삶이 얼마나 잘한 선택인지를 새삼 깨닫는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때로는 스스로 건방지다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하는 이상한 궁금증이 느껴지기도 할 지경이다. 물론 모든 직업이 서로 깔보지 않아야 하며, 타인들의 인생도 저마다 보람과 즐거움이 있다고 믿기는 하면서도 말이다.
요즈음에도 나는 아직도 해야 할 많은 글쓰기를 계획하고, 주변 사람들이 퇴직과 은퇴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자신의 생이 끝나기 전에 과연 지금 설계하는 글들을 다 쓸 수나 있을는지가 오히려 걱정스럽고, 그런 걱정은 즐거운 '일'에 대한 기쁨이 된다.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나는 요즈음에도 많은 시간을 집에서 혼자 지낸다. 본적지가 서울이요, 평생 서울에서 살았으면서도 나는 '시내'를 한 달에 두세 번밖에는 나가지 않고, 반경 1㎞ 동네를 벗어나는 것도 한 주일에 한두 번이요, 현관문조차 나서지 않고 이틀이나 사흘을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들과 얘기를 하지 않고 집안에서 혼자만 지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입안이 상하는 기분이 들어 하루에 열 번 이빨을 닦아서 "에나멜질이 다 벗겨질 지경이니 좀 덜 자주 닦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까지 들어가며, 내가 집안에만 박혀서 살아가는 까닭은 그런 시간이 가장 즐겁기 때문이다.
즐거운 일만 하루종일 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글쓰기를 하는 까닭이다.
● 연보
1941년 서울 출생 1965년 서강대 영문과 졸업 1964∼78년 코리아헤럴드·코리아타임스 기자, 브리태니커코리아 편집부장 등 근무 1983년 계간 '실천문학'에 장편 '전쟁과 도시' 발표 등단 1990년∼현재 이화여대 통역대학원 초빙교수 소설집 '학포 장터의 두 거지' '동생의 연구' '낭만파 남편의 편지' '착각' '미늘' '미늘의 끝' 장편 '가을바다 사람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나비 소리를 내는 여자' '태풍의 소리'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번역문학상(1982) 김유정문학상(199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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