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 스케치14일 대북 비밀지원 사건에 대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해명을 읽어 내려가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침통해 보였다. 김 대통령이 "죄송하기 그지없다"고 사과하면서 "참담하고 가슴 아픈 심정일 뿐이다"고 말하자 회견장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임동원(林東源) 통일특보와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 등 비서진도 굳은 표정으로 대부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만 박 실장이 시종 고개를 떨구었던 반면, 임 특보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점이 대조를 이뤘다.
김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제가 가장 갈망한 것은 원만하게 임기를 마치고 물러가는 것이었다"면서 10일 남은 임기를 대국민 사과로 마무리하게 된 회한을 드러내기도 했다. 임 특보가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으로 누를 끼쳐 죄송하다"고 언급하는 대목에선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검찰이나 특검 출두 의사를 묻는 질문이 나오자 한동안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답변을 마친 뒤 김 대통령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통령으로서 마지막이니 악수나 하자"면서 취재진의 손을 하나하나 잡았다.
회견은 김 대통령이 이날 자정을 넘겨 결심을 내리면서 급히 마련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통령은 임 특보와 박선숙(朴仙淑) 대변인 등에게 이 같은 뜻을 알린 뒤 새벽까지 원고를 직접 작성한 뒤 아침까지 글을 가다듬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일말의 오해라도 없어야 한다는 듯 임 특보의 대북송금 보충 설명문은 '대가'라고 쓰인 부분을 손으로 일일이 '권리금'으로 고쳐져 배포되기도 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 대국민 담화 요지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 참으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현대측의 협력을 받았습니다. 현대는 대북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7대 사업권을 얻은 것입니다. 정부는 평화와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에도 불구, 이를 수용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된 이상 정부는 진상을 밝혀야 하고,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져야 합니다.
북한은 법적으로 반국가단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에 대해 한편으로는 안보를 튼튼히 하고, 한편으로는 화해협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의 이중성과 북의 폐쇄성 때문에 남북문제에선 불가피하게 비공개로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경우도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충정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만 국민 여러분께선 저의 평화와 국익을 위해서 한 충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여야 정치인 여러분께도 호소합니다.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때입니다. 각별한 정치적 결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결정에 남북관계의 미래와 민족과 국가의 큰 이해가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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