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청와대의 해명으로 의혹만 난무하던 대북 비밀지원설의 실체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현대가 자체적 필요에 의해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에 대한 대가로 북한에 5억달러를 보냈다'는 것이 청와대가 밝힌 대북송금 의혹사건의 핵심 요지. 특히 대북송금액 5억달러 중 2억달러에 대해 국정원이 송금 편의를 제공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국정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편의를 제공했는지, 산업은행 대출과정에 누가 어떤 압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없고, 대북송금의 총액 및 전달경로,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성 여부, 북한에 건넨 돈의 용처 등에 대한 의문점들이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대출외압은 없었다?
대북송금의 경위를 발표하면서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산업은행 4,000억원 당좌대출 외압설'에 대한 해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우선 발표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산은 대출은 순전히 현대의 유동성 위기 때문에 이뤄졌으며 대출과정에서 정부의 압력은 없었다"는 종전 입장을 간접적으로 재확인한 셈이지만, 수많은 관련자들의 증언이나 현대상선의 분식회계 정황, 대출서류 조작 의혹 등을 감안할 때 외압의 존재는 확실시되고 있다. 실제로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여신현황 자료를 보면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2000년 6월 대출 당시부터 문제의 2억 달러(2,235억원)는 2년 넘게 10여 차례나 만기 연장되는 등 산은 내부에서조차 일종의 '성역'처럼 다뤄졌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당시 청와대 경제라인에 의한 외압설이 꾸준히 제기돼 온 만큼 대출과정의 의혹에 대한 보다 솔직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어떤 경로로 북에 송금했나
임동원(林東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는 "국정원이 현대의 요청으로 2억달러의 '환전 편의'를 제공했으며 2000년 6월 9일 2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고 밝혔다. 이는 당초 야당과 일부 언론이 남북정상회담 일정 연기(6월 12일→13일) 의 사유로 제기한 '6월 12일 송금설'을 뒤집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감사원도 이날 "산은 대출금 중 2,235억원이 수표 26장 형태로 외환은행에 입금(지급제시)된 날은 6월 9일"이라고 공식 확인, 송금일자를 둘러싼 의혹은 어느 정도 해소될 전망이다. 하지만 문제의 산은 대출금 2억달러가 외환은행의 어떤 계좌로 들어왔는지, 국정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편의를 제공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궁금증이 남는다.
임 특보는 이날 기자회견 후 "국정원 계좌로 송금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고 밝혔지만, 현대상선이 채권단의 감시를 피해 비밀송금을 하려한 정황상 현대상선 계좌도 아니라면 과연 어떤 성격의 계좌인지 의혹이 생긴다.
더구나 이 '제3의 계좌'에 입금된 돈이 다시 어떤 경로를 거쳐 북에 전달됐는지도 진상규명 차원에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현대상선이 전세계에 포진한 해외지사들을 동원한다면 충분히 비밀리에 자금을 빼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국정원에 도움을 요청한 배경도 의심스럽다.
대북송금 5억 달러가 전부인가
청와대는 현대가 7대 경협사업 독점권의 대가로 북한에 주기로 약정한 돈이 5억달러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가운데 국정원이 송금편의를 제공했다는 2억달러 외에는 나머지 돈의 송금내용에 대해서는 함구, 대북송금의 총규모를 둘러싼 의혹이 다시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상선 2억달러와 별도로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구체적 증거와 함께 제기한 대북송금액은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반도체) 스코틀랜드 공장매각대금 1억 달러 현대건설 싱가포르 지사를 통한 1억5,000만달러 현대건설의 대한알루미늄공업 매각대금 4,800만달러 등으로 대략 3억달러 선. 청와대의 '5억달러' 송금 주장과 대충 아귀가 맞는다. 하지만 주요 송금의 경위가 완전히 베일에 감춰진 상황에서 야당이 여전히 '10억달러 대북송금' 의혹을 강도 높게 제기하고 있어, 여진은 계속될 전망이다.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인가 아닌가
2억달러의 송금시점이 2000년 6월 9일로 확인되면서 '현대측으로부터 정상회담의 대가성 자금이 송금되지 않아 정상회담이 연기됐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잃게 됐다. 하지만 어찌 됐든 현대상선이 남북정상회담을 코 앞에 두고 다급하게 대출을 받아 송금을 시도했다는 점, 더구나 현대전자 스코틀랜드 매각대금의 송금시점도 6월 9일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정상회담 대가성을 둘러싼 논란은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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