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 때인 1558년 10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던 퇴계 이황(1501∼1570)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었다. 이 첫 만남에서 고봉은 퇴계의 학설을 비롯해 성리학의 요체에 대해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제기했다. 당시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였다. 그로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두 사람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일상의 사소한 반성부터 당대 지성계를 뒤흔든 '사단칠정론'의 철학 논쟁까지를 두루 담은 두 사람의 편지는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논쟁과 우정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젊은 사학자 김영두(36·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옮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발행)는 퇴계와 고봉이 주고 받은 편지를 빠짐없이 묶은 서한집이다.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퇴계와 고봉의 드높은 정신 세계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오늘의 우리말로 수려하게 풀어낸 번역의 빼어남 때문이다.
'번역이 매우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하자 그는 "원문이 워낙 잘 씌어진 글이어서 그렇다"며 물러섰다. "번역하면서 감탄을 많이 했어요. 아,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글 자체가 맛있고, 표현이 아름답고 적절한데다 내용도 아주 논리정연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 깃든 그들의 느낌과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만나는 문장은 한문으로 씌어진 옛글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하는 본보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전보다 국어사전을 더 많이 찾아가며 단어 하나 하나를 옮겼다"고 했다.
퇴계와 고봉의 서한은 이미 번역돼 있다. 이번 책은 무엇이 다를까. 그는 "원문이 비교적 자유롭게 씌어진 편지글임을 감안해서 되도록 일상의 말투로 자연스럽게 풀었다"고 말했다.
"퇴계나 고봉은 훌륭한 성현이고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었습니다. 편지로 개인적 하소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지요. 그들의 인간적 냄새를 전하기 위해 '힘을 빼고' 옮겼습니다."
그는 "번역이 즐거웠다"고 했다. 좋은 글을 만난 자체가 기뻤고, 퇴계와 고봉의 향기에 취했으며, 위대한 풍모에 반했다는 것이다.
"퇴계는 고봉을 만난 몇 달 뒤 편지에서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사단칠정론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썼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편지에서도 퇴계는 자신의 학문적 오류를 인정하는 학자적 양심을 보이고 있지요. 일곱 살 둘째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고봉의 편지를 옮길 때는 가슴이 찡했지요.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으며, 학문적 논쟁으로 팽팽히 맞설 때에도 극진한 예를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봉은 퇴계의 이론에 가장 거세게 반발한 사람이었는데도, 퇴계는 공직에서 은퇴할 때 선조 임금에게 쓸 만한 인재로 유일하게 고봉을 천거할 만큼 고봉을 아꼈습니다. 고봉도 퇴계의 죽음에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을 했지요."
600쪽이 넘는 이 책은 일상의 편지와 사단칠정론을 비롯해 학문을 논한 편지를 분류해 1부와 2부로 따로 묶었다. 일상의 편지에서 두 사람은 자칫하면 사화에 걸려 정치적 위험에 빠지게 되는 처세의 고민을 이해하고, 학자와 관리의 길을 병행하는 어려움에 공감했다.
"재미있는 것은 관직 생활에 대한 고봉의 태도 변화입니다. 고봉은 관직에 처음 나간 30대 초반만 해도 퇴계더러 '선생같은 큰 인물이 어려운 시기에 세상에 나와 큰 일을 해야지 왜 물러나려 하느냐'고 말하지만, 40대에 들어서서는 물러나 학문에 힘쓰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해서 문제가 될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강한 사람이었던 고봉도 정치적 처신의 어려움을 실감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퇴계와 고봉의 면모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바르게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고 했다. 욕망을 긍정하지 않는 엄숙함이 오늘의 눈으로 보면 답답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6년의 나이 차와 지위를 뛰어넘어 진실하게 사귀었던 그들의 초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책은 그 모습을 맛깔진 우리말로 섬세하고 그려내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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