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10시 현대그룹 직원들은 일손을 멈추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대북송금 관련 대국민성명 발표 TV 생방송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난해 9월말부터 4개월 동안 회사의 운명을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상황에 몰아넣던 대북송금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그러나 발표가 끝난 뒤 직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한 직원은 "이번 발표로 파문이 진정되길 기대했는데 결국 현대가 모든 책임을 떠안으라는 말이군요"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말대로 이날 발표에서 김 대통령과 임동원(林東源) 통일외교안보특보는 그동안 제기된 의혹 가운데 일부만 해명하는 데 그치고, 대부분 의혹은 현대의 몫으로 돌렸다. 의혹의 핵심이 되고 있는 대북송금액에 대해 현대로부터 5억 달러라고 들었을 뿐이라고 했고, 정상회담의 대가가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북한과 현대가 회담 전까지 송금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송금과정에서 환전 편의를 제공한 사실은 시인했지만 그 내용은 공개하길 거부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현대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 현대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 각종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함구로 일관하고, 감사원에 자료 제출을 고의로 지연하는 등 눈치보기와 시간 끌기에만 급급해왔다. 게다가 대북송금을 주도한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회장과 김윤규(金潤圭) 사장은 "4,000억원을 대출 선박용선료와 부채상환에 사용했다"며 거짓말과 말 바꾸기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목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과정이 올바르지 않으면 인정 받을 수 없다. 대북경협사업도 마찬가지다. 이제 진실을 밝힐 열쇠는 다시 현대로 넘겨졌다. 물론 대북 관계 상 밝히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역사의 진실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금강산 일정을 하루 단축, 15일 귀국하는 정 회장의 입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혁범 경제부 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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