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723>許百鍊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723>許百鍊

입력
2003.02.15 00:00
0 0

1977년 2월15일 남종화(南宗畵)의 거장 허백련이 86세로 작고했다. 허백련의 호는 의재(毅齋)다. 전남 진도 태생. 진도는 조선조 말 이래 양천(陽川) 허씨 집안에서 배출한 몇몇 대가(大家)들 덕분에 남종화의 성소가 되었다.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미산(米山) 허형(許瀅: 1850∼1931),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의 3대는 죄다 당대의 손꼽히는 남종화가였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소치가 귀향해 첨찰산(尖察山) 아래 지은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미산과 남농이 나고 자란 터라, 소치·미산·남농을 운림산방 3대라고 부른다. 의재는 이들 3대와 직계 혈족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운림산방에서 집안 어른인 미산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의재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이내 법률가의 길을 접고 그림으로 돌아왔다. 그는 1935년부터 37년 사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수석 입선하면서 화단에 나왔다. 일본에서도 기법을 익혔지만, 의재의 작품 세계는 소치와 미산의 남화산수를 계승·발전시켜 토착화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았다.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디 엷은 담채로 처리하거나 묵으로 그린 그의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해서 서민적이면서도 기품이 있다. 그것은 화사한 세필을 마다하고 형상보다 뜻을 더 무겁게 여긴 소치에게 그 뿌리가 있다.

의재는 일제 말기인 1938년에 광주에 정착한 뒤, 연진회(鍊眞會)를 만들어 전통 서화의 부흥을 꾀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소치에게 운림산방이 있었다면, 의재에게는 춘설헌(春雪軒)이 있었다. 그는 해방 뒤 광주 무등산 기슭에 이 벽돌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기거했다. 춘설헌은 지난 1986년 광주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고 종 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