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승려들이 겨울 한철 동안 한 곳에 모여 수행하는 동안거(冬安居)가 15일 끝난다. 이번에도 전국의 87개 선원에서 2,100여 승려들이 깨침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화두를 들었다.그러나 전남 남원 지리산 기슭의 실상사(주지 도법 스님) 화림원은 금강경 읽기로 동안거를 보냈다. 참선이 아니라 경전을 읽는 간경결제(看經結制)로 수행을 대신한 것이다.
지난 석 달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근본경전)인 금강경 해석을 놓고 스님과 재가불자 100여명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동안거 해제를 1주일 앞둔 8일 오후 경내 화엄학림에서는 그 동안의 논강(論講)을 평가하고 마무리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금강경의 핵심은 산냐(지각 작용을 뜻하는 상·想의 산스크리트어)의 척파입니다." 논주(論主)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은 "부처의 가르침은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인데 우리 불교는 불성이니, 여래장이니, 생사초월의 근본자리니 하면서 힌두교식 신비주의와 초월주의 개념에 집착해 오히려 산냐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뒤 금강경에 대한 이해 역시 왜곡됐다고 질타했다. 이번 간경결제의 교재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 1,600년 동안 한국 불교는 중국의 현장스님과 구마라즙의 한역본에 의지해 금강경을 이해해 온 반면, '금강경 역해'는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동화사 강주인 해월 스님은 "금강경의 핵심은 반야바라밀(분별을 정화해 순수한 직관이 온전히 드러나는 지혜의 완성)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면서 전통적 강원의 입장을 되풀이해 강조했다. 철오 스님(사천 구룡사 주지)은 산냐의 척파와 반야바라밀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한 스님의 발언에 대해 "둘을 같은 것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경전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한국 불교의 다른 쟁점들도 거론됐다. '불성은 존재하는가' '선(善)과 불선(不善)은 무엇인가' '방편(方便)은 불교의 치부를 얼렁뚱땅 넘기려는 것 아닌가' '천도제는 비불교적인가' 등 뒷방에서 스님들끼리만 주고받던 민감한 주제가 공개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참석자들은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경전 읽기라는 형식이 참선을 대신할 수 있는 수행법이 될 수 있다는 데서 의의를 찾았다. 도법 스님은 "현실적으로 선방에 모여 석 달 동안 참선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스님들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며 "그럴 수 없는 스님이나 재가불자에겐 경전 읽기가 참선과 동등한 수행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백일법문으로 한국 불교계를 각성시킨 것도 동안거 때였으며, 결제의 형식은 참선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바뀌어 왔다.
/실상사(남원)=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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