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하구 자체가 바로 비무장지대예요. 그 덕분에 서해안 강 하구 중 거의 유일하게 자연상태로 남게 됐죠." 11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김포시 북단 하성면 시암리. 북쪽의 관산반도를 끼고 내려오는 임진강과 김포반도를 돌아 흘러드는 한강이 만나 물 천지가 펼쳐졌다. 거대한 호수 같은 합수지점 가장자리로는 수만평의 갈대밭이 열을 지어 바람에 흩날렸고, 물이 조금씩 빠져 나간 자리에는 갯벌이 잿빛의 고운 살을 드러냈다.물과 산이 어우러진 절경, 한강 하구
한강 405.5㎞, 임진강 272.4㎞의 종착역인 한강 하구. 분단 역사만 아니었다면 서해 뱃길의 창구가 됐을 이 곳은 그러나, 아니 그 덕택으로 개발의 '불도저'를 비켜갔다. 강 건너 북한 개성시 개풍군이 빤히 보이는 이곳엔, 사람과 배 대신 각종 철새들이 모여들면서 산하(山河)의 태고적 내음마저 내뿜었다.
김포 북단을 좀더 따라가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애기봉 전망대에 오르자 한강 하구의 경치는 더욱 장관이었다. 황해로 물결치며 도도히 흐르는 강 너머 북한쪽 관산반도의 얕은 봉우리들이 둘쑥날쑥 솟구친 풍경이 절묘했다. 어슴푸레 개성 송악산 봉우리도 손에 잡힐 듯했다.
이인식(李仁植) 습지보전연대 집행위원장은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강 하구는 어류의 산란장이며 오염물질의 정화조로 바다를 살찌우는 허파"라며 "서해 강하구가 대부분 둑으로 막히고 매립되거나 항만으로 개발됐지만 이곳만은 그 모습 그대로 간직돼 서해안 생태계의 마지막 남은 숨통인 셈이다"고 말했다.
저어새의 마지막 생존장
"저 곳이 세계적 희귀조 저어새가 마지막 생존의 불꽃을 피우는 곳이에요." 황호섭(黃鎬燮) 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팀장이 가리키는 무인도 '유도'가 황해로 흘러가는 한강 위로 안개에 가릴 듯 말듯 보였다. 둘레 길이2㎞ 남짓한 유도는 전 세계에 7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저어새의 몇 안되는 번식지 중 하나다. 세계적 희귀조인 저어새 번식지로 유도를 포함해 국내 서해안의 몇몇 무인도가 거의 유일한 상황이다.
유도를 좀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는 몇 차례 군부대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문수산성을 지나 월곶면 보구곶리의 해안초소에 도착하자 거북 등갑 같은 유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어새들이 4∼6월 산란을 한 후 대만 등지로 날아가 월동하고 있는 지금, 이곳은 갈매기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리는 간조 무렵이 되자 갯벌이 조금씩 드러났다. 황 팀장은 "비무장지대내 무인도가 풍부한 먹잇감을 품은 갯벌에다 사람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덕분에 사람을 극도로 기피하는 저어새에겐 천혜의 보금자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어김없이 진행되는 개발
저어새뿐 아니라 한강 하구 일대는 황오리,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큰기러기, 쇠오리 등 철새 수천마리가 드나드는 월동지이며 숭어, 참게, 황복 등의 어류도 풍부하다. 특히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삼각주를 포함해 한강 하류 일대는 재두루미 도래지로 유명해 지역 자체가 천연기념물 250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재두루미 1,000여 마리가 월동했던 이곳은 80년대 이후부터 일본 이즈미 지방으로 건너가는 중간 기착지로 격이 떨어지고 말았다. 기껏 월동하는 재두루미 숫자는 70∼80마리. 기러기나 오리류 철새들의 숫자도 해마다 줄어들기는 마찬가지. 안창희(安昌熙) 경기북부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한강 하구 일대에 자유로가 들어서고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철새들의 서식환경이 위협받고있다"며 "그나마 민통선과 비무장지대가 한강 하구 개발의 저지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강 하구 철책선 철거 논란도 분단의 상흔이 '자연의 보호막'이 돼버린 역설중의 하나. 경기 파주, 고양, 김포시가 한강 하류를 따라 김포 제방도로와 자유로변에 쳐진 군 철책선을 제거하기 위해 군과 협의에 들어갔지만 환경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혜경(李惠敬) 인천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뚜렷한 생태계 보전 대책도 없이 철책선마저 없어지면 철새들의 서식환경 파괴는 순식간이다"고 말했다. 김포 제방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길, 오리류 철새 수백마리가 한강 하류에서 노닐고 있었다. 이들이 짐을 싸야 할 상황이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김포 북단의 저어새 번식지는 그나마 비무장지대 덕에 아직은 안전한 셈이었다.
/김포=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멸종위기 저어새
몸길이 72㎝, 길다란 검은 색 부리에 하얀 깃털의 저어새.
주걱처럼 길쭉하게 뻗은 긴 부리에 왜소한 다리가 코믹한 인상마저 풍기지만 이 새가 처한 현실은 결코 코믹하지 않다.
동아시아 습지대에서 살아가는 저어새는 전세계적으로 7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으며, 10년이내 멸종할 확률이 80% 정도로 추정되는 '심각한 멸종위기 종'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월동지인 대만에서 71마리가 떼죽음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저어새의 번식지 선택은 매우 까다롭다. 김포 북단 한강 하구에 있는 무인도 유도를 비롯해 서해 우도, 비도, 석도 등 국내 서해안의 무인도서가 거의 유일한 번식지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하이난 섬, 대만, 일본 등지에서 월동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동 경로와 생활사, 번식 생태 등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저어새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증폭되면서 저어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공위성 추적장치를 부착해 이동경로를 추적하거나 유전적 계보 파악 작업 등의 연구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환경운동연합이 서해 무인도에서 발목에 이름표를 붙여 날려보낸 저어새가 대만에서 발견돼 이동경로가 처음 확인되기도 했다.
또 환경운동연합이 대만과 함께 '동아시아 저어새 보전 네트워크' 구성을 추진하는 등 저어새 보호를 위한 국제적인 협력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이인식 습지보전 집행위장
"한강 하구만은 더 이상 허리를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
DMZ 생태기행에 함께 나선 이인식(李仁植·50) 습지보전연대 집행위원장은 강 하구 습지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 하구 갯벌은 천혜의 자산이지만, 모든 하구들이 둑들로 막혀버리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이 위원장은 1990년대 중반 경남 창녕 우포늪 보전운동을 벌여 국내 처음으로 '습지보호구역' 지정을 이끌어낸 '습지보전운동의 대부'. "습지의 가치를 몰랐던 시절이라 주민들을 직접 만나 막걸리를 같이 마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설득시켜야 했지만 결국 습지보전운동의 한 전기가 마련된 셈이었죠."
우포늪 보전운동은 결국 99년 습지보호법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습지를 매립해 농경지로 바꾸던 일이 다반사였으나 이제는 갯벌을 비롯해 습지는 이제 그 어느 자연생태계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게 됐다.
80년대 전교조 운동으로 해직됐던 이 위원장이 환경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낙동강 페놀사건. "단순한 오염 처리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자연 생태계 자체를 보전하는 것이죠."
경남도청을 설득해 2008년 국제 습지보전회의인 람사회의 유치활동도 펴고 있는 그는 DMZ 습지 보전에도 두 팔을 걷고 나서고 있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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