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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한인 땀과 꿈의 100년]<7> 미국의 官界로 진출한 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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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한인 땀과 꿈의 100년]<7> 미국의 官界로 진출한 한인들

입력
2003.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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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 행정부 고위직에 한국계의 진입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현재 차관보급만 4명이 진출해 있는데, 시각 장애인으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 교육부 산하 '전국장애인자문협회'의장이 된 강영우(59)씨와 노동부 여성국장 전신애(59)씨, 법무부 법률담당 차관보 존 유(35·한국명 유 춘)씨, 미 총무처(GSA)의 교통·자산관리담당 차관보에 오른 주홍엽(49)씨 등이 그들이다. 또 차관보급은 아니지만 해럴드 변 상무부 특허감독관과 수전 순금 칵스 아태계 자문위원 등도 한국계 고위 공직자로 꼽힌다.이들은 모두 당당히 실력 하나로 소수계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미 주류 사회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강영우씨는 시각장애라는 어려움을 딛고 32세 때 피츠버그대에서 특수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국내 시각장애인 박사1호가 된 인물이다. 1992년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을 창설,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000년 미국 저명인사 사전, 2001년 세계 저명인사 사전에 오르기도 했다.

존 유씨는 하버드대 역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1992년 예일대 법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존 유씨는 예일대 대학원 재학 당시 법대 교수로 있던 고홍주씨 밑에서 수학, 사제의 연을 맺기도 했다. 그는 미 대통령 선거 플로리다주 수개표 당시 공화당측 증인으로 재검표 작업에 참여해 부시 행정부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휘문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던 1966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온 주홍엽씨는 식품점 종업원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 밖에 진교륜 전국 아·태 공화당협회 회장, 길옥빈 캘리포니아 아·태 공화당연합회 부회장, 필 그램 연방 상원의원(공화·텍사스)의 부인인 웬디 리 그램 여사, 이교성 캘리포니아 전 부시 선거본부 책임자 등 미국내 공화계 한인 인사들의 고위직 진출도 예상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 이전에 미 행정부의 차관보급에 오른 인물로는 클린턴 행정부 당시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에 임명된 고홍주(48·미국명 해럴드 고) 예일대 교수가 유일했다는 점과 비교해볼 때 이는 눈부신 약진이다.

한국인의 미주 이민역사가 100년이 넘었지만 본격적인 이민은 한국전쟁 이후로 그 역사가 아주 짧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의미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내 한인사회는 이를 이제 40대를 넘어서고 있는 이민 2세들이 본격적으로 미국 행정부의 고위직에 오르기 시작하는 '신호탄'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미 장관까지 배출한 일본계나 중국계에 비교하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현재 미 부시행정부 내에는 일본계인 노먼 미네타씨가 교통부장관으로 있고 중국계인 일레인 차오씨와 데이비드 추씨는 각각 노동부장관과 국방부 차관으로 재직중이다.

다른 동양계보다 한국계의 행정부 고위직 진출이 늦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상대적으로 짧은 이민역사. 고홍주 전 차관보는 "한국전쟁 후 이민을 온 이민자들의 2세는 아직 고위직에 오를만한 나이가 아니다"며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다. 이민 1세들은 언어장벽 등으로 관직 진출의 기회를 잡기 어려웠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이민2세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 2세들은 아직 40대가 안돼 고위직에 발탁될 만한 경력을 쌓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공직사회에서 한국계의 저변이 얇다는 지적도 있다. 고위 공직에 오른 대부분 한인들은 발탁 인사에 해당할 뿐, 공직사회 밑바닥부터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이민을 시작해 우리보다 이민 역사가 짧은 베트남계의 경우 행정부 하위직에 대거 진출해 차근차근 기반을 쌓아가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미국 LA한인회 관계자는 "행정부 하위직부터 시작하는 한국인들이 없을 경우 지금 나타나는 한인들의 눈부신 고위 공직 진출이 일회성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kimin@hk.co.kr

■ 고홍주씨 가족의 성공사례

고홍주씨 가족의 성공사례는 미연방 교육부의 공식연구 대상이다. 고홍주씨 가족은 8명에 박사학위만 12개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 집안이다.

고홍주씨 가족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그의 가족사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아버지 고광림씨는 주미공사로 재직하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마자 미련없이 앞날이 보장된 길을 버리고 이국땅의 망명객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5·16 군사쿠데타가 자신의 신념인 '민주주의와 인권'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고홍주씨도 평생 인권문제에 매달리는 법학자로 성장했고, 마침내 인권담당 차관보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어머니 전혜성씨의 교육철학을 빠뜨릴 수 없다. 그 자신이 보스턴대 사회학, 인류학 박사인 그는 6남매를 모두 하버드, 예일 등 미국 명문대 박사로 키워냈다.

어머니 전씨는 개인주의적인 미국사회에서 아이들은 철저히 한국적으로 가르쳤다. 어머니가 평생 지킨 원칙은 2가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족들이 모두 아침식사 때는 한 식탁에 빙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게 했다.

또 매일 저녁 책상 8개를 한방에 갖다 놓고 온 가족이 함께 공부하며 밤을 지새웠다. 한마디로 '밥상 공동체'요 '책상 공동체'였다. 고홍주씨는 "미국사회에서도 가족들이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한국적 가족주의는 성공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인 이민자 1세대는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어냈습니다. 또 이들은 2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가 돼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일군 경제적 성공과 희생을 바탕으로 20년 안에 한국계 고위공직자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 전신애 美노동부 국장

"미국내에서 소수계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보다 두배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한국계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 중앙정부 차관보급에 오른 전신애(59) 미 노동부 여성국장은 성공비결을 묻자 모범답안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부 내에는 동양계, 특히 여성의 성공이 이제 전혀 새로운 얘깃거리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실제 그의 상관인 일레인 차와 노동부 장관은 중국계 여성이다.

1965년 그가 이민올 당시만 해도 그의 성공을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인 스스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도미(渡美)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도피였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의 주류'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오직 동성동본과의 사랑을 위해 봉건적인 조국을 버렸다. 때문에 그가 성공하기까지 일등공신을 꼽으라면 단연 남편 전경철(60)씨다. "미국에 와서 편안한 가정주부로 머물려는 저의 등을 떠밀어 공부를 시킨 사람이 남편이었어요."

전씨는 "한국에서는 부인이 더 출세하면 보통 남편들이 배아파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이가 오히려 나의 성공을 더 기뻐해 주었다"며 "우리는 진정한 동반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남편의 외조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미국의 주류사회에 접근하려는 스스로의 노력이 훨씬 컸다. 전씨는 84년 아시아계 미국인 담당 일리노이 주지사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돼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89년 일리노이 금융규제국장에 올랐고 92년에는 노동국장에 취임, 흔히 '주(州)장관'으로 불리는 직책을 맡아 99년까지 10년 동안 장수했다. 그리고 지난 미국 대선 때는 부시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그것이 계기가 돼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지금까지 공직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소수계로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비법"이라며 웃었다.

"아버님이 존경한 유일한 미국인은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링컨 책을 사다 주시고, 교훈을 많이 주셨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늘 링컨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뭐냐고 묻자 "3P를 지키라고 하고 싶다"며 "한국인으로서 미국사회의 주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매사에 긍정적이고(Positive), 활동적이며(Proactive) 인내(Persevere)하라는 것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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