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정법상으로는 비록 성경을 읽으려고 촛대를 훔쳤다 해도 남의 물품을 훔친 행위만큼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만화나 소설책 등을 읽기 위한 경우 보다야 정상 참작 소지가 있겠지만, 절도행위 자체는 용서가 안 된다. 아무리 동기가 고상하고 거룩할지라도 결과에 대한 추궁은 별개의 사안이다. 결과가 좋다고 과정상의 모든 잘못이나 오류가 덮어지기가 불가능한 이치와 같다.요즘 들끓고 있는 대북 뒷거래 의혹이 이런 형상이다. 정부는 대북 비밀 송금행위가 전쟁을 막고, 평화를 구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변하고 있다. 통치권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니 사법적 판단은 옳지 않다고도 한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을 상대한 '초법적 범위'의 일을 우리 법의 잣대로 판단하기는 적절치 않다고 했다. 통치권자가 안 지키는 법을 그럼 누굴 보고 지키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김 대통령의 이 말은 성경을 읽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촛대 도둑질쯤은 눈 감아야 할 것 아니냐는 투다. 과연 그럴까. 지금 세간에는 별의별 추측과 의혹이 난무한다. 진실을 감추려 했던 정부의 자업자득이다. 무엇보다도 비밀송금이 정상회담 성사의 대가라는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비유컨대 성경을 빙자해서 불량만화나 소설책을 읽으려 촛대를 훔친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인 것이다. 왜 현대가 쫓기듯 허둥대며 2억달러를 정상회담 직전 김정일의 것으로 의심되는 비밀계좌로 송금했는지. 이 돈의 대출에 누가 여신규정과 관련 법을 어겨가면서 산업은행에 외압을 가했는지. 북한에 간 돈이 과연 2억달러 뿐인지. 또 왜 주무부서인 통일부를 배제하며 추진했는지. 눈 덩어리처럼 불어나는 의혹 앞에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입장이 처연해 보인다.
문제가 꼬인 것은 정부의 부도덕성과 부정직성 때문이다. 일개 언론사의 북한 방문에도 상당량의 '지참금'은 현실이다. 금강산 관광도 1인당 200달러의 입산료를 물지 않는가. 그런 북한이 정상회담은 '맨 입으로' 응했다? 믿을 사람이 있을까. 대북 송금설에 청와대만 펄쩍 뛴다. 여론의 압박으로 나온 감사결과를 마지못해 시인하며 통치행위라 덮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송금은 청와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잡아뗀다. 소도 웃을 일 아닌가. 현대 패밀리의 한 사람은 '북한에 건네진 2억달러는 정부를 대신해서 보낸 것'(한국일보 1월31일자 1면)이라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이런 인식으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틀렸다.
정부의 '깔고 뭉개기' 때문에 대북비밀송금문제는 이제 '가래'로도 막기가 어렵게 됐다. '국익은 커녕, DJ의 사익과 정권안보차원에서 저지른 국기 문란 행위'라는 야당측 주장이 오히려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성난 여론은 갈수록 특검 도입을 압박하고 있다. 이제 특검조사는 사실상 불가피한 상황이다.
통치권 차원이니, '초법적 일'이니 하는 말은 언어의 유희일 뿐,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현재까지 드러난 2억달러를 비롯, 얼마만큼의 돈을 누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위해, 북쪽의 누구에게 전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진솔한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파문을 낳고 있다. 심지어 DJ의 노벨상 수상과 연계하는 보도까지 있다. 나라망신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항의 한다지만 얼마나 효과적일지도 의문이다. 가뜩이나 북한의 핵무장 기도와 이 송금의 연계 가능성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털고 갈 것은 터는 것이 상책이다. 부스럼 딱지는 새 살이 안 된다. 노무현 당선자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그렇지 않고는 새 정부의 정책이 아무리 투명해도 신뢰를 얻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새 정부의 대북정책도 음습한 공작차원으로 이해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 진 환 주필 jhr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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